강릉에서 집회가 열렸습니다.
근간에 하나님께서 강릉 근교인 주문진에 예상치도 못했던 영혼들을 붙이시면서 종들과 성도들에게 주문진에 갈급한 영혼들이 많다는 사실을 감각케 하셨습니다. 주문진에 거주하고 계신 신금선씨는 5년 전 기쁜소식지,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또 우리 선교회 목사님들의 말씀 테이프를 접하시고는 신앙적 갈등 속에서 책을 읽고, 테이프를 들으면서 차츰 마음을 열어 얼마 전 목사님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또 요한복음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부분을 읽고 나신 후에는 “내가 바로 그 죽은 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는 놀라운 간증을 들려주기도 하셨습니다.
역시 같은 주문진에서 건강원을 하고 계신 어떤 일반 교회 장로님 부부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권을 4년 전에 우연하게 입수하게 되신 후로, 4회에 걸쳐 책을 꼼꼼히 읽어 보셨고, 근간에는 신앙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진정한 구원에 대해 소망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가판대에서도 많은 신앙서적들이 대여되고, 판매되면서 하나님께서 신앙 서적을 통해 새로운 심령들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심을 볼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린 자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둔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무심히 건네주고 있는, 혹은 온 마음을 다해 건네주고 있는 작은 책 한권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모든 걸 주밀히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때 더더욱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셨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결국 우리로 주문진 집회의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9월 21일 오전 10시 30분.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강사이신 김선영 목사님께서는 디모데후서 3장 15절로 첫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명쾌하게 성경을 정의 내려 주셨습니다.
"구원이란, 어딘가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을 건져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사람들은 담배나, 술에 길들여지듯이 어떤 생각에 끌려 다니면서 살아갑니다. 하와가 과일을 먹은 것은 단순하게 무엇인가를 먹는 행위가 아니라, 사단의 영역 속에 그 여자가 들어갔다는 방증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하와처럼 사단의 영역에 속해진 채로 자신도 모르는 사상에 끌려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의 영역에 속해진 상태로 무언가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끌어갈 능력도 없고, 정확하게 어떤 것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내 눈앞에 닥쳐진 어려움을 뛰어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믿었던 하와는 결국 온 인류를 죄악 속에 빠뜨렸고, 주님과의 연계를 끊어 놓아, 우리의 순수했던 영을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놀라우신 주님은 죄악 아래 놓여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구원”은 “말씀을 믿는 것”에서 가능해 지는데, 저녁 시간에는 “구원”의 열쇠라고 할 수 있는 믿음에 관해 역설하셨습니다. 창세기 27장을 세세하게 풀어내시는 것을 듣는 동안, 마음속의 의문들도 씻겨 내려가고, 희미했던 세상과의 경계도 견고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매끈매끈한 사람이었고, 그렇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분명한 점이었습니다. 그 분명한 사실을 뛰어 넘어 야곱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시점은 어느 때였습니까? 바로 어머니 리브가의
『너의 모든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이 말씀이 떨어진 순간이었죠? 그렇다면 리브가의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25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누가 말했다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죠? 그리고 로마서 9장 11절을 또 찾아보겠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하시는 그 순간, 야곱은 자신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복을 입게 되었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에 관해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자, 찾아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부터 13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어떻습니까?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 우리의 행위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말씀은 이미 떨어졌습니다. 말씀이 떨어진 그 시점에 야곱이 복을 입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미 의롭고 거룩해진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께서 준비하신 이번 집회를 통해 기다리는 영혼들보다 우리 마음에 먼저 주님이 직접 심어주시는“믿음”을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들을 보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근간에 박목사님께서는 영상체팅 시간을 통해 문둥이 네 사람을 들어 사마리아 성의 기근을 끝내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을 동원하신다는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로 소원을 품게 하셨던 그 집회의 첫날,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을 움직이고, 세상을 능히 이기고 계셨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