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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옥 | 2016.11.20 21:04 | 조회 6286

    20161120일 주일오전말씀

    말씀: 5:12 21

     

    무한한 주님의 사랑

     

    하나님이 하시는 사업이 있습니다. 복음 사업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에 내가 뛰어 들고 연관 지으면 하나님이 다 복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을 봅니다. 어제부터 안산에서 칸타타 공연을 시작했는데 이전에 여러 공연장에서 목사님의 메시지를 문제로 삼은 적이 있습니다. 공연의 일부, 성탄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처음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국 모든 공연장에서, 세종 문화회관에서도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마음의 중심이 가능하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계셨습니다. 목사님 당신이 메세지를 전하고 싶으셨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야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그 중심에 분명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일이 잘되는 쪽으로 우리는 중심이 가 있지만 목사님의 마음에는 복음이 중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나님이 도우신다.” 전국에서 그냥 칸타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가지로 도우셨습니다.

     

    마인드 교육을 하면서도 며칠 전에 화상 채팅을 통해 케냐, 우간다 선교사님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마인드 교육이 의논이 되고 있는데 목사님의 마음 방향과 다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대통령이 목사님과 면담을 한 후 받아들이겠다고 해서 그 일이 진행이 되고 있는데 그 일만 진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인드 학과, 마인드 과목이 개설이 되기만 하면 됩니까? 우리가 가서 가르쳐야 하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님과 그 중심을 잡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인드 교육을 진행하는 것보다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카톨릭 대학이 있는데 우리에 대해서 마음을 닫았다가 마인드 교육을 통해서 마음을 열었는데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다고 하기에 그러면 그곳에서는 하지 말자 했습니다. 목사님 가까이에서 마음을 받다 보니까 일을 크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복음에서 빗나가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홍콩의 YMCA, 복음이 없기에 그 단체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좋은 숙소, 강단이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임대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단체에서 숙소, 강단, 축구장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사회단체로 전락이 되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복음 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에 우리의 삶을 연결시키면 하나님은 만가지로 돕게 되고 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논산 훈련소에서 마인드 교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이라서 제가 직접 가서 마인드 교육을 하게 되었는데 전에 MOU를 맺으면서 논산훈련소 소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자 절반이 훈련을 받는 곳인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배속되어 근무하는 병사들을 강연해 달라 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 군인들이 질문을 해 왔습니다. 보통 23일의 교육을 받는데 12일의 교육 훈련으로 하루 종일 교육을 받기에 힘들어 할텐데도 여러 명이 질문을 하는 것을 담당 지휘관이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 다음 날도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정기적으로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우리에게 시범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둘째 날 끝나고 나니까 다음 달에도 부탁한다고 하였습니다. 첫 날, 마인드 강연 보다는 굿뉴스코 훈련을 실컷 홍보를 하였습니다. 투마로우 월간지가 매달 200권 들어갑니다. 굿뉴스코에 연결될 수 있으면 복음과도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굿뉴스코, 투모로우를 실컷 홍보를 했는데 다음 달에도 와서 강연을 해 달라는 것을 보며 정말 감사했습니다. 복음을 위하면 하나님이 만가지로 도우시는 것을 봅니다. 내가 나를 지키려 하는 것보다도 복음을 위하면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어서라도 우리를 위하시는 것을 봅니다.

     

    칸타타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을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하를 움직여서라도 호적을 하라고 하며 그 만삭의 몸을 끌고 베들레헴으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열어서라도 복음을 위하고 또 하나, 믿음으로 사는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복음 전하는 사업을 하고 계시고, 복음을 가진 우리에게는 믿음을 가르치는 믿음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위하는 일에 하나님이 만가지로 도우시지만 그 뿐만 아니라 믿음을 배우려 할 때, 믿음을 잘 모르고 어설프지만 그 발을 내딛을 때 하나님은 믿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만가지로 도우십니다. 사단은 그 일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해서 그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옆길로 가도록, 다른 길로 가도록 엉뚱한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가는 길에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복음이 아닌 종교의 길로 가게 만들었고 믿음의 길이 아닌 그와 다른 비슷한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믿음의 길이 아닌 행위의 길, 오늘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하고 삼천포로 빠지도록 엇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믿음의 길이 아닌 행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말씀에 분명한 선을 그어 놓지 않으면 행위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믿음을 배우려면, 첫 번째 행위와 결부시키지 말아야 하고, 두 번째는 다 이루었다는 가운데로 마음을 옮겨야 하고 이것이 천국 열쇠를 사용하는 것이며 마음을 옮기면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역사가 일어납니다.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 마음 하나 옮긴 것뿐인데 불뱀의 효력이 끝이 납니다. 하지만 마음을 옮겨 놓았어도 여전히 형편이 변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와서 내 마음을 지배하곤 합니다.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심령은 능히 병을 이기거니와 심령이 상하면 누가 병을 이기겠느냐 묻습니다. 내 마음에서 마음을 옮기면 다 이루어지는데 형편과 문제를 보며 그 생각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은 기도와 간구 입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아뢰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믿음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 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행위와 결부시키지 말라는 그 의미에 하나는 내가 잘했느냐, 못했느냐, 육신적이냐, 내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육신적이기에 하나님이 일을 하지 않고 나를 어렵게 하시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행위의 길로 가지 말라 합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저 편으로 건너가자 했을 때 그 말을 행위로 받아서 자기들이 노를 젓고 있습니다. 나인 성의 과부에게 울지 말라 했을 때, 내가 울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믿음의 길은 주님이 울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너가자 했을 때 그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인 성의 과부에게 울지 말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울지 않게 해주시겠다 하신 것이고 죽은 아들이 살아나야 울지 않을 수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의 죽음을 두려워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시겠다고 믿어야 합니다. 술을 끊는 것이, 담배를 끊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에 내가 끊으려고 하면 절대 끊을 수 없습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의 길로 가야 합니다. 술과 담배를 끊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주님이 끊게 해주시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작심삼일, 얼마나 가겠습니까? 하늘 문이 열려서 하늘의 능력이 오는 것과 내 의지와 각오로 버티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날 심홍섭 전도사님의 간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박목사님의 간증 속에 목사님이 교제를 해 주어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해주셨느니라는 말씀으로 교제를 하셨습니다. 15분 동안 교제를 하다가 마음을 옮겼습니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면서 온전하다고 믿으라 했습니다. 술을 딱 끊고 전도사님이 되었습니까? 그 파란 만장한 삶, 왜 술로 인생을 보내게 되었는지, 그리고 목사님의 교제를 받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형편없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님의 말씀과 다른 자신을 계속해서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가시는 곳마다 간증하시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개인의 의지와 각오가 아니었습니다. ‘역시 나는 안되는구나’, 이는 사람의 각오와 의지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말씀은 여전히 온전하다고 합니다. 여전히 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나타나는데도 내 마음이 다시 죄인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 말씀 편에 마음이 고정 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아프지만 나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술과 담배를 하고 있으면서도 끊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문을 열기 위함입니다. 하늘 문을 닫아 놓고 자기 의지와 각오로 됩니까? 내 의지와 각오를 내려놓고 하늘 문을 열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남편, 변하지 않는 남편, 여러분이 바꾸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옮겨 놓고 하늘 문을 열어 보십시오. 당신은 왜 그 모양이냐고 하지 말고 말씀 안에서 온전해 졌다고, 문제라고, 안 바뀐다고 하지 말고 말씀 편으로 마음을 옮겨 놓으십시오. 하늘 문을 열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온전해 질 수 있고 변할 수 있습니다. 하늘 문을 닫아 놓고 남편을 쪼아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 문을 여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차피 내가 바가지를 긁어도 안되고 노력해도 안 될 일입니다.

     

    믿음을 배우려고 발을 내딛고 나가면 하나님은 만가지로 우리 삶을 돕게 되어져 있습니다. 너무 감사한 것은 그 다음 단계, 지난주일 날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그릇, 소망의 그릇은 바닥이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그릇은 바닥이 날 수 없습니다. 엘리야의 믿음이 바닥이 났을 때 믿음의 단계를 기억하고 발을 내딛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소망이 바닥이 난 엘리야, 주님이 그에게 찾아가서 어루만지고 일으켰습니다. 또 다시 눕자 다시 찾아가셔서 어루만지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한 주간 주님의 사랑의 그릇이 바닥나지 않는 것이 너무 감사했고 내 믿음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고 소망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엘리야, 주의 사랑이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넘어져도, 자주 자주 넘어져도 문제가 되지 않고 바닥이 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도 없고 소망도 없고, 그러나 주님의 사랑의 그릇은 바닥이 나지 않기 때문에 주의 사랑은 늘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이끌고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한 사람, 아담, 그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 이르렀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5:17~18)

     

    한 사람 아담, 그리고 한 범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죄,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지금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담의 죄가 얼마나 큽니까? 자기의 벌거벗은 모습이 부끄러워 치마를 해 입고 있지 자기의 범죄가 얼마나 큰지 그 자신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메르스라는 병이 퍼질 때에 그 병을 옮기는 사람을 다 욕했습니다. 어느 지역에 공무원 한 사람 때문에 병이 퍼져가고 의심환자가 생기고 찾아서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온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습니다. 제가 멋모르고 비행기에 내렸는데 검역을 까다롭게 하기에 알고 보니 제가 타고 온 비행기가 중동을 거쳐서 온 비행기였습니다. 어느 비행기를 타고 오느냐에 따라서 달라졌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고 난 이후에 하나님이 어떻게 아담을 대하였습니까? 누구 때문에 망했다고, 누구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다고 한 평생을 그 사람을 원망하고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인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는데 하나님은 아담에게 당신의 큰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담과 화와를 책망을 해서 거반 죽여 놓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 그들, 아담은 화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화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아담이 저지른 죄가 이렇게 큰데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으로 인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담보다 큰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만들 수 없습니다. 아담만이 지을 수 있는 죄입니다. 엄청난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려고 하는 세상, 아담과 화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사단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아닌, 마귀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담을 달리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죄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이 이른 그 죄에 대해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 주시면서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8~19)

     

    중요한 단어, 같이, 그곳에 동그라미를 쳐 보십시오. 죄인된 것 같이 의인이 됩니다. 성경은 표시를 많이 해 놓아야 합니다. 다시 성경을 보면서 그 때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죄인된 것과 똑같이 의인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면 복음은 너무 쉽게 풀어집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한 범죄로 죄인이 되어졌습니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한 범죄 때문에 내가 죄인이 되었으면 내 행동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저지른 악은 나를 죄인 만드는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이미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인이 된 부분에 있어서 사람이 여러 가지 죄를 짓습니다. 옛날에 신창원이라는 범죄자가 있었습니다. 범죄를 하고 도망을 다니면서 자기가 잡히면 사형을 당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5년짜리 죄, 1년짜리 죄를 5개 지으면 10년 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일 큰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는 우리를 죄인 만드는데 있어서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미 아담 때문에 완벽한 죄인이 되어졌습니다. 나와 상관없이 100% 은혜로 죄인이 되어졌습니다. 그렇게 죄인된 것같이 의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기도를 잘하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된 것을 믿어야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인이 되어져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내 행위와 상관없이 공짜로 죄인이 되었기에 또한 마찬가지로 의롭게 되는 것도 내 행위와 상관없이 의인이 됩니다. 어떻게 죄인이 되어졌는지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일반교회에서 아담이 저지른 죄가 원죄, 우리가 짓는 죄를 자범죄라고 말합니다. 자범죄는 없습니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100% 은혜로 죄인이 되었고 의인이 되는 것도 100% 은혜로 되어졌기에 먼저 죄인이 어떻게 되어졌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는데 아담이 모든 사람에게 끼쳐놓은 패악을 아담 때문이라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한 의의 행동으로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해 놓으셨습니다. 아담이 저질러 놓은 엄청난 일을 아담이 책임지고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한 번에 다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아담이라고 해 보십시오. 나 때문에 다 죽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죄를 저질렀는데 그 죄를, 그 피해를 하나님이 아들을 희생하시면서 한 방에 다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같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다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인류가 저지른 죄 가운데 가장 큰 죄가 아담의 죄입니다. 어느 누가 세상에다 죄를 다 집어넣을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아담이 저지른 모든 죄를 다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악을 저지르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하여도 주의 사랑이 내 허물, 연약함, 악을 감당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아담도 하나님이 받으시는데 우리가 어떤 악을 저지르고, 어떤 연약함이 있어도 주님이 왜 받지 못하시겠습니까? 만가지 허물, 만가지 추하고 악한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으로 오라 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금을 귀하게 여기는데 변치 않기 때문에 금반지를 끼고 결혼식을 합니다. 그 사랑이 변치 않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은 다 변합니다. 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금도 오랜 세월이 지나니까 부식이 됩니다. 변치 않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의 사랑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떠나갔던 베드로가 변하고 제자들도 변할찌라도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또 다시 찾아가고, 또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조금 교만하고 육신적이라고 주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금방 쉽게 변하기 때문에 주님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교도소의 교도관들은 사람을 잘 신뢰하지 못합니다. 개과천선을 해서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얼마 후 또 다시 교도소에 들어오고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고 믿지를 않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도 사람을 잘 믿지 못합니다. 그분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람을 잘 믿지 못합니다. 우리는 변치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도 잘 믿지 못합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77:7~9)

     

    절대 아닙니다. 그 인자하심은, 그 허락하심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 없기에 걸핏하면 내가 잘못해서 내게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며 변치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니까 그때부터 내 방법과 내 계산으로 나를 위하는 곳으로 갑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는 사랑은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사랑은 다 변할찌라도 주님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실까?’ 주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면 오늘도 내게 은혜를 베풀고 일을 하실 것이라 믿어야 합니다. 아담과 화와에게 주님의 사랑이 변치 않았기에 사단의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들을 위하여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 엘리야가 믿음을 잃어버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으키는 사랑,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방황하며 길을 잃었을 때 그에게 찾아가서 보여주신 사랑, 그보다 더 큰 사랑,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엄청난 죄를 지은 아담,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우리, 하나님이 왜 우리를 버리며 더욱이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주의 사랑을 베풀지 않겠습니까?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육신적인 나일찌라도 내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고 긍휼을 베풀기를 원한다는 그 말은 내 행위를 보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 없는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의 유익을 위한 주님의 사랑, 그 뜻을 따라 가다 마음에 부담이 찾아오면 사단이 속여 놓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길을 가게 할 때, 에스더를 보면 모르드개가 왕 앞에 나가라고 할 때 죽이는 법이 그에게 부담스러웠습니다. 유다 민족을 구하러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더의 유익을 위하여서 나가라 합니다. 마치 전쟁이 일어나서 포탄이 빗발치고 있으면 참호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하지만 앞날을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5분 후에 그 참호 속에 직격탄이 날아온다면 그 참호를 벗어나야 합니다.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나오라는 것은 그 곳에 있으면 망하기에 나오라 합니다. 왕후의 위치에서 유다 민족과 하나님을 위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유익을 위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는 것이기에 부담을 느끼는 곳에서 그대로 머물러 망하지 말고 부담을 넘어 나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분이기 때문에 그곳에 있으면 망하니까 그 마음을 옮기고 삶을 옮기라 합니다. 지금까지 안전하였다 할찌라도 그곳에 계속 있으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교회를 위하는 것 먼저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하며 그 유익을 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좋은 길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음을 위한 푯대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가이드가 깃발을 들고 가는 것은 자신에게 속한 관광객에게 그 위치를 알려 주고 따라오라 하듯이 복음을 위한 삶이 부담을 넘어 우리에게 그 길을 가이드해주고 있습니다. 부담스럽다고 머물러 있지 말고 사단의 소리, 그 부담을 넘어 주의 길을 믿고, 그 사랑을 믿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나를 위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옮기려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와 있으면 그 사랑은 당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나를 위해서 옮기라 합니다. 그 삶을 하나 옮길 수 있는 것은 그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차서 내 판단과 생각을 믿지 말고 주의 길을 따라가면 복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고 믿음의 발을 내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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