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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옥 | 2018.01.07 21:30 | 조회 3633

    201817일 주일오전말씀

    말씀: 요한21: 15~19

     

    믿음을 향하여 갈 수 있는 마음의 나침반

     

    지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때 목사님이 신년사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올 해 신년사의 말씀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예전 어느 목사님이 우연히 어디를 가다 교회 신년사 말씀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같은 말씀 구절이 적혀 있어서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 말씀의 끝에 내 증인이 되리라가 아니라 되어라고 고쳐서 현수막을 걸어 놓았습니다. 잘못 만든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들의 신앙이며 마음이었습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이 차이가 전 세계 기독교를 갈라놓았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이 없고 행위로 흘러가서 행위를 강조하는 교회로 나뉩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과 내가 증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증인이 되어라는 말씀이 맞는 것처럼 들리는 이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행위 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공동 생산, 공동 분배, 유물론 사상과 무신론을 주장합니다. 중국의 공산주의 사상 속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신론, 신이 없다 하면서 신을 믿지 않게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 주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놓았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하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잘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다신교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왜 다신교 사상을 가지고 있을까?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공산주의가 중국 나라를 이끌어 갔지만 지역, 시골, 동네 구석구석까지 그 사상을 넣어 주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 하에 있지만 지방 사람들의 마음에는 중국 대대로 내려오는 미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은창 전도사에게 왜 중국 사람들은 다신교 사상을 가지고 있느냐 물었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미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공산주의에서 무신론을 주장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신교 사상을 버리지 못한 이유, 근본 인간들의 마음에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함으로 인해 사단이 넣어주는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교회에서 현수막을 걸 때에는 교회 다니는 초신자가 현수막을 걸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성경 구절을 걸 것인지 의논을 했을 것이고 행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증인이 되어라는 말씀이 맞았기에 말씀을 변질 시켰습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을 때,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되기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어라는 것은 노력해서 행위를 의지하라 합니다. 믿음과 행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행위 가운데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모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계속해서 행위 가운데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행위 가운데 있는 마음이 믿음 편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어떤 문제이든지, 사람 속의 갈등을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이 안 되는 부분,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행위 가운데 들어가면 내가 나를 바꾸려고 행위를 보게 됩니다. 내가 바꾸려고, 고치려고, 내가 해결하려고 하면 행위를 보기 때문에 변했나, 안 변했나, 달려졌나, 안 달라졌나, 아직도 해결 되지 않은 자신을 보면서 계속해서 피곤한 삶을 살며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떤 죄의 문제가 있든지 간에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어떤 죄의 문제이든지 십자가의 보혈이 다 사했다고 믿으면 행위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 지, 믿음의 길을 가고, 믿음의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자연스럽게 행위 가운데로 가게 만듭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 가운데로 빠져 들게 만드는 인간의 본성, 옛날에는 항해를 할 때 GPS나 인공위성 항법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나침반 하나가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지도를 놓고 정북을 가르치는 나침반을 놓고 수시로 점검을 하면서 제대로 가고 있는 지, 망망대해 바다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도 나침반이 있어야 합니다. 늘 믿음을 향하여 갈 수 있도록 나침반이 있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문구점에 가면 나침반을 팝니다. 고장이 날 때도 많고 제멋대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항해를 하는 사람이 한 달, 두 달씩 항해를 하면서 식량과 물을 챙겼어도 나침반을 나두고 왔으면 다시 배를 돌려 항구로 가야 합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 500원 짜리 나침반을 의지해서 갈 수 있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 나침반, 내 나침반은 자주 자주 고장이 납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고, 선교회와 종이 있어서 정확한 나침반으로 믿음에서 틀어져 있는 마음의 방향을 자주 믿음 편으로 옮겨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는 법을 배우면 만가지 문제가 있어도 내 마음을 믿음 편으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증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옮겨 놓고 내가 쉴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어느 날 형제로 신앙을 하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연합의 중요성, 신앙은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들었고 그 다음 주에 연합되지 않는 삶이 다 저주로 끝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이 노아와 연합되지 않으니까 노아의 허물을 보고 판단을 하였고 그로인해 함만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함의 자손들이 다 저주를 받는 것을 들었습니다. 연합의 중요성을 깨달으니까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연합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흘러갔습니다. 타락된 인간의 마음속에 신앙의 잘못된 부분을 들으면 내가 바로 잡고 내가 고쳐야 한다는 마음으로 흘러갑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 가운데로 흘러가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연합해야지, 그 마음으로 흘러갔습니다. 연합하려고 노력을 하고 애를 쓰는 삶, 그러나 내 행위를 보면서 그 결과를 보니까 연합되지 않는 행위가 보이면서 낙심이 왔습니다. 또 다시 노력을 합니다. 결과적으로 안되니까 제가 시험이 들었습니다. 종과 교제를 하면서 믿음을 가지라 했습니다. 처음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영적으로 어렸기에 너무 막연했습니다. 한참 뒤에 말씀을 듣는데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을 듣다가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접목을 하면서 마음을 믿음 편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난 다음에도 노력해서 안 되던 그 삶이 믿음을 가지면 연합된 삶으로 살게 될 것을 기대했지만 여전히 내 삶에는 연합되지 않는 내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 연합하려고 행위 가운데 있을 때는 문제가 되었지만 믿음을 가졌을 때는 형편이 나타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합된 자로 믿음을 가지고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구원을 받을 때 모든 죄를 사했다는 것을 믿음으로 여전히 죄가 나타나도 의로운 자로 믿었던 것처럼 행위 가운데 있을 때는 연합된 모습이 나타나야 쉼을 누렸지만 여전히 그 모습이 나타나지 않아도 믿음을 가지고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에 이 믿음의 영역에 들어가면 형편이 달라졌냐, 내가 변했느냐가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했습니다. 주님에게 가면 마음에 쉼을 누리게 됩니다. 정확한 마음의 선이 그어지면 여러분 삶의 문제나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문제 가운데 있다는 것은 매여 있는 삶이고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쉼과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믿음 편으로 옮겨 놓는 믿음을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5:13~15)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는 행위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도 많은 목사들이 빛이 되라고, 소금이 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이도 빛이 되려고, 소금이 되려고 노력을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뻔히 보면서도 소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은 말씀을 이야기 합니다. 소금이며 빛이 되었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믿으면 되는데 문제는 빛이 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안 됩니다. 실패하는 이유, 성경은 믿음을 이야기하는데 행위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참된 믿음의 교회와 잘못된 행위 가운데 빠져 있는 교회와의 차이입니다. 참된 말씀은 영과 혼과 골수를 쪼갭니다. 영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고 빛이라 하셨고 소금이라 하셨고 혼적인 교회는 그렇게 되라고 이야기 합니다. 빛이 어디에 있느냐의 차이, 이미 빛인데 말 아래 두면 그 빛이 밖에 비추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등경 위에 두어야 이 빛이 멀리 비취입니다. 말 아래 둔 빛도 빛이지만 빛의 역할을 못할 뿐입니다. 어느 위치에 있느냐, 말 아래 있으면 바람도 타지 않고 어려움도 없지만 등경 위에 두면 어려움도, 문제도 있지만 빛이 많은 사람들에게 비추어져서 그 빛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하고 , 고통을 받았습니다. 등경 위에 올라간 사람들, 그리스도임을 밝힌 사람들은 박해를 받고 매를 맞고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등경 위에 올라간 그들 때문에 많은 복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배경을 조금이라도 이해시켜주는 책이 카타콤의 순교자였습니다. 이들이 등경 위에 있음으로 인하여서 거센 바람과 핍박을 받았지만 처형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로마의 원정 군대를 이끌고 여러 나라를 굴복시키고 로마로 돌아온 마세라스 로마 근위 장교, 정작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로 골치 아파했습니다. 로마의 최정예 부대, 죽음 앞에서 떠는 모습을 보았는데 죽음 앞에 담대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궁금해 했습니다. 지하 동굴로 그리스도인들을 직접 만나면서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스토리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전 세계 초강대국으로 로마 사람들은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누렸지만 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감옥에서 찬양을 하고 순교조차도 영광스럽게 여기며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 한 명의 순교로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어려움 없이, 부담 없이 안일하게 사는 것이 말 아래 사는 것과 같습니다. 행위 가운데 있는 사람의 눈에는 행위로 보입니다. 강한 행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들을 행위 가운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내 행위로써 안되며, 저주며, 멸망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19:8)

     

    무엇을 명하든지 다 지켜 행하겠다 백성이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그 행위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출애굽기 3장에서 이미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섬겨라가 아닙니다.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우리가 다 지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안 되는 이유,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시겠다 하는데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지 않고 자신이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신앙은 참 쉽고 단순하며 주님이 하실 것을 믿으면 됩니다. 주님은 이미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주님이 해 주시겠다고 하고, 백성들은 자기가 하겠다고 하고, 충돌이 일어납니다. 한 번은 컴퓨터가 상용화되어서 가정마다 사용이 될 때였고 우리 선교회에서 인터넷 방송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시험 방송을 시작했는데 당시 선교사님들은 전화비도 굉장히 비쌌기 때문에 전화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외롭고 어렵게 선교를 할 때 였는데 인터넷 시험 방송을 할 때였고 아프리카에서 박 목사님의 말씀을 화상으로 보면서 한 목사님이 너무 감격해 하셨습니다. 인터넷 방송을 보기 위해서 모뎀이 필요했습니다. 컴퓨터를 잘 하는 형제가 조립을 해서 사용했는데 모뎀을 장착한 후로 컴퓨터가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를 설치한 형제를 타박해서 빨리 고쳐달라고 했는데 이리 저리 보고 한참을 점검한 후에 모뎀 카드를 빼냈습니다. 인터넷 방송을 보려고 설치했다고 하니까 이것 때문에 그렇다고, 이 모뎀 카드가 컴퓨터와 호환이 되지 않아서 충돌이 일어나서 그러니 호환되는 다른 모뎀 카드를 장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데 있어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행위 가운데 있는 이것이 믿음의 세계와 자꾸 충돌을 일으킵니다. 호환이 안 되는 모뎀 카드를 장착해 놓으면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심홍섭 전도사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구원을 받았는데 술주정뱅이로 살았습니다. 늘 하루에 소주 6병을 기본으로 먹으면서 사시니까 주위 사람들이 비난을 했습니다. 내가 온전히 지려고 노력을 하니까 10, 20년이 지나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목사님의 15분 교제, 충돌을 일으키는 그 카드를 빼내었습니다. 내가 온전해 지려하는 노력 하는 카드를 빼내어 내니까 지금은 전도사가 되어 있고 집회 강사가 되고 칸타타 공연의 스텝으로 복음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과 충돌을 일으키는 카드를 빼내야 합니다. 이는 행위의 카드입니다. 이 행위의 카드가 장착되어 있는 동안 계속해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은 분명히 출애굽기에서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 하셨는데 우리가 명하신 대로 다 행하겠다 하니까 하나님의 뜻을 가로 막는 일을 합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26:31~35)

     

    베드로의 실패, 제자들의 실패, 행위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지 않고 자기들이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4:19)

     

    되게 하리라되어라는 말씀의 차이, 믿음과 행위의 차이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 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내가 훌륭한 제자가 되고, 내가 신령한 제자가 되려고 하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어렵고 힘들다는 사람, 그 마음 안에 말씀을 행위로 바꾸는 변환 장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 전부 다 말씀을 행위로 바꾸었습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자기가 잘난 사람으로, 안 되는 사람은 낙심으로 치우친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이 되게 하리라 하셨으면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행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고, 물고기 잡으러 가게하며, 자기 마음을 믿는 마음을 빼어 내셨습니다.

     

    치킨 좋아하십니까? 케냐에 가면 켄칙이라고 있습니다. 그 통닭이 너무 맛이 있습니다. 전기구이 통닭의 장점, 튀김 통닭의 장점을 합해 놓았습니다. 전기로 기름을 빼어낸 후 기름에 튀깁니다. 한국에서 강사로 오신 분들에게 사 드리면 다 좋아하셨습니다. 자기를 믿는 마음이 빠진 베드로의 상태가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21:15)

     

    베드로의 마음에 자기를 믿는 마음을 빼어 냈을 때 더 이상 자기의 행위를 보지 않습니다. 그가 주저하지 않고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신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믿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옛날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습니다. 뭐든지 다 맞추는데 어떤 사람이 그 점쟁이를 시험하고 싶어서 손에 몰래 숨겨 가지고 가서 내 손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맞추라 했습니다. 참새가 들어 있다고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그 참새가 죽었느냐, 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살았다고 하면 손을 꽉 쥐어 죽이고 죽었다면 살아 있는 참새를 보여 주려고 하니까 점쟁이가 네 마음에 달려 있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베드로는 내 인생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조차도 주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는 부인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그 믿음대로 일을 하십니다. 야곱의 축복, 야곱이 무엇을 잘해서 축복을 받았습니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축복을 받습니다. 만가지로 야곱보다 뛰어났던 에서, 그가 축복을 받지 못한 이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발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는 위대한 발견입니다. 주님이 나로 주님을 사랑하게 해 주시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떠나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그러나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처음과 똑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베드로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깊은 데로 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던 주님이 이제는 오른 쪽으로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잘한 것 하나도 없는 위치, 말씀의 판단을 믿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니까 물고기가 가득히 잡혔습니다. 변한 것은 나이지, 주님은 변하지 않고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셨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전에는 내가 주를 따르고 사랑하고 부인하지 않으려고 행위 가운데 있었지만 내 행위와 상관없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셨고 나를 이끌고 찾아오신 주님, 이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또 다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 사랑이라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사랑을 받은 베드로는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물으셔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믿는 마음을 가지고 행위 가운데 있을 때는 주님이 그를 들어서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인하고 떠나가서 물고기 잡는 길을 가도록 내어 버려두셨습니다. 자기가 부인되고 자기를 믿는 마음이 빠져 나가니까 내 양을 치고 먹이라 합니다. 형편없고 연약한 사람을 행위 가운데로 벗어나서 믿음으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형편이 없는데, 나 같은 사람이 신앙을 해서 무엇하냐, 교회가 나를 싫어 할 거야, 목사님이 나를 싫어 할 거야, 그렇게 시험이 들고 신앙을 하지 않고 주변의 말에 매여서 문제를 삼고, 이런 베드로가 양을 치고 먹일 수 있는 이유, 베드로의 마음에 지금까지 몰랐던 세계, 자기를 믿는 마음을 빼어내고, 행위를 빼어내고 믿음 가운데 이끌려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양 떼를 맡깁니다. 행위 가운데 있을 때 부인하고 떠나갔는데 베드로만 부인하지 않았다면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의 등살에 살아남을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교회는 온전한 사람, 반듯한 사람이 신앙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형편없고 엉망인 사람이 자기의 행위를 빼어내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의 영역에 들어가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허물, 형편없는 아브라함의 모습,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빼어내고 행위에서 믿음의 영역으로 옮겨서 아브라함을 이끄셨습니다. 베드로 또한 믿음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죽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각오와 결심을 가진 그에게 하나님은 이를 빼어 내셨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든 지간에, 여러분 자신의 문제이든, 가정의 문제이든, 건강, 돈의 문제이든 풀어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변화가 오기 전에, 형편이 달라지기 전에 내 마음에 먼저 쉼이 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신년사 말씀을 주셔서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이 신년사 말씀대로 올 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게 하셨다고 간증하는 사람, 열심히 뛰어다닌 사람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길과 기회를 주시고 역사를 하셔서 증인으로 사는 삶을 주십니다.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교회가, 말씀이 나침반이 되어서 자주 자주 행위 가운데로 흘러가는 마음을 바로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지만 영적인 타락된 길, 그 너머에 가보면 인간적으로, 도덕적으로도 타락된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이치, 신앙의 문제를 풀려고,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어떤 모습이 나타나든지, 어떠한 결과가 오든지 마음에서 자유를 누리고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믿음이 정착되었을 때 믿음의 열매를 얻게 하십니다. 이런 마음에 나침반이 있어서 마음을 비추어 보고, 행위 가운데로 가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이 문제를 풀려고, 해결하려고 하는 나를 보며 돌이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물물교환을 했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고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것을 팔고,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가치의 물건을 시장에 가지고 가야 했습니다. 지금은 물건에 상응하는 돈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더 발전해서 지금은 카드를 가지고 갑니다. 제가 지갑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호주머니에 카드 두 장을 가지고 다닙니다. 한 장만을 가지고 다니면 카드가 휘어서 잘 안 쓰는 카드 두 장을 겹쳐서 가지고 다닙니다. 현찰이 없어도, 해외를 가도 다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갈 때는 상응하는 행위를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만을 가지고 가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만한 행위를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문물 교환하는 행위의 시대가 아닙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처럼 그렇게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카드, 한도가 없기에 그 카드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믿음의 카드를 긁고 다녀도 부도가 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 믿음대로 다 일을 해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 하나 있으면 다 되도록 하셨습니다. 만가지 문제,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을 꺾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오지 않습니다. 믿음을 주셨지만, 카드를 주어도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 모습과 상관없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나는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가진 자를 기뻐하십니다. 믿음 없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 가운데 올 한해 믿음으로 수많은 부분에 역사를 경험하고 많은 사람이 주님에게로 돌아오는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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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8/0114) 이성옥 2018.01.23 3566
    >>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8/0107) 이성옥 2018.01.07 3634
    190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1224) 이성옥 2017.12.26 3970
    189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1210) 이성옥 2017.12.15 4105
    188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1126) 이성옥 2017.11.29 3727
    187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1119) 이성옥 2017.11.23 3643
    186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1112) 이성옥 2017.11.19 4004
    185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1105) 이성옥 2017.11.11 3955
    184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1029) 이성옥 2017.11.05 3922
    183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0305) 이성옥 2017.03.11 5932
    182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0226) 이성옥 2017.02.26 5953
    181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0219) 이성옥 2017.02.26 5842
    180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0212) 이성옥 2017.02.15 5839
    179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0115) 이성옥 2017.01.25 5798
    178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0108) 이성옥 2017.01.13 5496
    177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7/0101) 이성옥 2017.01.08 5535
    176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6/1204) 이성옥 2016.12.11 5838
    175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6/1127) 이성옥 2016.12.03 6012
    174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6/1120) 이성옥 2016.11.20 6288
    173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6/1113) 이성옥 2016.11.20 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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