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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뉴경인 | 2015.09.09 16:04 | 조회 9446

    2015년 9월 6일 주일오전말씀
    말씀: 엡4:15~24


    교회로부터 얻어지는 영적인 감각


    감각할 수 있는 기능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감각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람에게 오감이라는 감각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맛보며, 냄새를 맡고 느낄 수 있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능, 그 중 가장 예민한 감각이 후각입니다. 후각은 금방 지치고 피로해져서 냄새 나는 곳에 오래 있다 보면 그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많은 감각 기관이 있고 곤충들에게도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미는 눈이 있지만 멀리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개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은 더듬이 입니다. 손으로 더듬는 것처럼 더듬는 것이 아니라 개미의 더듬이는 냄새도 많을 수 있습니다. 길을 찾기도 하고, 자기편인지 아닌지를 구분합니다. 개미의 더듬이는 후각, 촉각 기능을 더불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듬이를 떼어 버리면 분명 눈이 있지만 마치 사람의 모든 감각 기능이 마비되는 것처럼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맵니다. 감각할 수 있는 기능, 그 기능이 뛰어날수록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초음파를 감지할 수 없지만 돌고래, 박쥐는 스스로 초음파를 내어 돌아오는 초음파를 감지해서 어두운 동굴에서도 부딪히지 않고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인해 죽어버린 영적인 감각
    물리적인 세계 말고, 우리 인간이 감지를 못하는 세계, 그 영역이 있는데 바로 영적인 세계입니다. 오감이 아닌, 영감, 우리 인간에게 그 감각이 죽어 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해서 그 영적인 감각이 죽어 버렸기에 영감을 잃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 사이버 신학교 동문들이 무전전도여행을 갔다 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음번엔 무전 전도 여행을 할 때는 차도, 텐트도 가져가지 말고 무전 전도 여행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집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하지’, ‘안되면 차에서 자고, 안되면 텐트에서 자면 되지’, 그 생각이 버려져야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영적인 감각이 죽어 버리니까 도덕적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소경은 점자라는 것을 가지고 글을 읽습니다. 옛날에 구원을 받고 학생회에 있을 때, 학생회를 인도하는 분이 소경이었습니다. 그 분은 정상인이 한글을 읽는 속도와 비슷하게 손으로 더듬어 가며 읽어 내려갔습니다. 점자도 글자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 나오는 박현재 형제님 할아버지가 우리나라 한글 점자를 만들었습니다. “손으로 어떻게 글자를 감각해서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맹인 학교 소경 가운데에서도 조금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점자 감각을 못 익힌다고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대신 손으로 감각을 해서 글을 읽어 내려갑니다.

     

    도덕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긴 가인
    우리 인간에게 영감이 죽어 버렸습니다. 도덕적인 기준,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감각하며 살아갑니다. 영감은 죽어 버리고 선악의 기준, 도덕적인 기준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이를 대신해 잇몸으로 살아가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가서 영감이 죽어 버린 시대에 가인을 보면 도덕적인 기준으로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땅의 소산을 가지고 도둑질을 한 것도, 사기를 친 것도 아닌, 땀을 흘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정당한 대가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렸는데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도덕적인 기준으로 보면 가인은 성실한 사람, 열심히 사는 사람, 정당한 사람으로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분하여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낯이 변한 이유,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감이 죽어 버린 사람이 도덕적인 기준과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감각이 오지 않습니다.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가인의 제사를 검토해  봐야 합니다.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가인의 제사를 보면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패하여졌느니라”(롬4:14)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행위로써 하나님을 섬겨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패하여 집니다. 만일 가인의 것을 하나님이 받았다면 성경과 신앙 전체를 다 뒤집어 놓는 결과를 낳습니다. 저주 받은 땅의 소산 외에,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를 하나님이 받는다면 우리 신앙 전체를 다 바꾸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 믿음의 사람들이 값없이 은혜를 얻었던 것이 다 패하여 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보았을 때, 잘못된 것이 보이지 않기에 영적인 감각이 더욱 필요합니다.

     

    육신의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감각이 없는 것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9)

    “감각 없는 자 되어”, 문둥병은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문둥병의 나병 균은 공기 중에 나오면 죽어 버립니다. 옛날에는 기준을 가지고 균을 가지고 진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병 환자인지를 테스트를 해 볼 때, 뜨거운 물을 발바닥에 부어서 가만히 있으면 문둥병으로 진단을 했습니다. 감각이 마비되어 살이 썩어져 가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손목이 떨어져 나가도 아프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독 문둥병자들을 많이 고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옵니다. 대표적인 문둥병자 가운데 나아만 장군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문둥병 때문에 나아만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없는 자 되어 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육신의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영적인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아져 영적 감각이 죽어버린 나아만
    “사마리아 있는 선지자 앞에 계시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계집 여종의 말을 듣고 선지자 앞에 섰던 나아만, 그러나 그 생각을 따라 분해하며 돌아가려고 합니다. 나아만의 종들이 그를 말립니다.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각을 가지는데 나아만은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음이 높으면 이 감각이 죽어 버립니다. 나아만도, 그의 종들도 처음 선지자 앞에 나아봤습니다. 선지자의 이야기 앞에 종들은 소망을 가지는데 나아만은 떠나가려고 합니다. 이곳까지 왔다가 분한 모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나아만, 다른 곳에 길이 없으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나아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의 몸뿐 아니라 마음도 교만해져 있어서 영적 감각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에게 잘못된 것을 깨우쳐 주기 어렵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감각이 되지 않으면 도덕적인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이 문제이냐?” 묻습니다. 영적으로 크게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서 벗어나 있고 대적하는 길에 서 있음에도 감각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에게 잘못된 것을 깨우쳐 주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잘못된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학부형들이 자식들에게 잘못된 것 하나 인식해 주려고 하면 너무 어려운 것을 봅니다. 요즘 아이들의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느 날, 저희 집에 택배가 왔습니다. 제 딸이 시킨 택배인데 노란색 스케이트보드가 왔습니다. 여고생이 치마를 입고 장난감 같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학교에 가겠다고 하는데 저와 제 아내가 말린다고 애를 먹었습니다. 지금 와서 제 딸에게 그것 타고 학교에 가라고 하니까 어이없어 웃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네가 옳다고 여겨도 어른들이 반대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액정 보호 필름을 떼어 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마인드 강연을 하면서 강한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스마트 폰 액정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줍니다. 옛날 폴더 폰 액정은 약해서 스크래치가 생깁니다. 스마트 폰은 아주 특별한 강화유리로 만들어졌기에 스크래치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강화보호필름을 붙이고 다닙니다. 애플사에서 코닝사에게 스마트 터치 폰을 만드는데 특별한 유리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연구 개발을 해서 특수 유리를 만들었습니다. 코닝사에서 특별하게 개발한 유리, 얼마 전까지 고릴라3까지 나왔습니다. 일반 유리에 비해서 훨씬 강한 강도를 가지고 있어서 스크래치가 생기지 않습니다. 보호 필름, 굳이 붙이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떼어 버리라고 주위 목사님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한 분 목사님이 양복 위 주머니에게 넣고 다니다가 실수로 떨어져서 유리와 함께 핸드폰 프레임이 깨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다른 목사님 것이 깨어져 버렸고, 또 다른 목사님은 제 말을 믿고 교회 형제님들에게 보호필름 떼어 버리라고 했는데 지금 양천 목사님은 스마트 폰 유리가 깨어진 체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 가서 액정 보호 필름을 떼어 버리고 다니라고 하지 못합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내게 영감이 없으면 영감을 가진 교회의 인도를 받아야
    영적인 세계 안에서 영적인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고 발견하게 된 사람은 내 감각이 틀렸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감각이 없으면 이제는 교회의 감각을, 인도자의 감각을, 그리고 하나님의 감각을 빌려야 합니다. 소경이 길을 갈 때, 지팡이를 가지고 찾아갑니다. 지팡이를 탁탁 치면서 갑니다. 소리를 통해서 공감 감을 느낍니다. 골목의 폭, 차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트인 골목인지, 그런 것조차도 그 소리를 통해서 감각을 느낍니다. 그러나 앞서 인도해 주는 자가 지팡이를 잡고 인도해 주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내가 애를 쓰기 보다는 이 영감을 가진 교회의 인도를 받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쉽습니다. 교회가 불편하게 여기고 종이 불편하게 여기고 주님이 불편하게 여기는 이 감각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 감각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으면 후각이 정말 예민하지만 오래 있으면 더 이상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 그렇습니다. 옛날 재래식 화장실에 가면 처음 독한 냄새가 나지만 한참 있다 보면 후각이 지쳐서 더 이상 냄새를 느끼지 못합니다.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내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무엇이 죄인지도 모른 체 살아갑니다. 이 감각은 내가 가지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없는 이유는 자기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연락하고 상합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나 혼자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감각이 아닙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 서너 명에게 이야기 해보면 대번에 감각이 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바로 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는 고집스럽게 살아갑니다. 자기가 옳았다는 편에 조금이라도 서기 때문에, 액정 보호필름 없애면 스마트 폰 화면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지만 한 명, 두 명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내 감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나누다 보면 감각이 옵니다. 내 감각을 버릴 때 영적 감각이 옵니다. 감각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 감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 저리 영적 감각이 없을까?” 그 말을 들어 본 사람은 자기 감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의 의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굉장히 악한 사람이 되고 인간의 의를 버리니까 의롭다 함을 얻고 완전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가 와서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자기 지혜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오지 않아 어리석고 미련한 자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온 사람, 자기 지혜를 버린 사람입니다. 감각이 없는 자, 자기 감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감각을 버릴 때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선한 사람이라도 자기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와 자기 선을 비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심히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 나름대로 선하게, 의롭게 사는 사람, 나름대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만들어진 아프리카 마하나임 바이블 칼리지  
    제가 아프리카에 가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마음, 영감을 가지고 일을 했을 때 아프리카에서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일을 한 것보다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케냐는 아프리카의 중심입니다. 아프리카는 도로가 발달이 되지 않고 경비행기 장이 발달이 되어 있습니다. 미고리에 가면 비포장 활주로가 있습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경비행기로 선교를 하고 물류를 나른 곤 했습니다. 케냐의 기독교 역사가 100년이 되었습니다. 케냐에서 마하나님 바이블 칼리지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성경 학교를 만든 적이 100년 동안 없었다고 합니다. 제가 지혜가 있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아프리카에 정식 4년제 신학교가 있습니다. 각 교단과 선교 단체에서 무료로 운영하고 있는 신학교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운 신학교와 기존 학교와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한 달에 5일간 와서 수업을 받고 가면 됩니다. 지난 백 년 동안 어느 누구도 이런 학교를 세우지 않았는데 이 학교가 케냐의 상황에 정말 잘 맞았습니다. 종교 등록증이 없어서 어려워하는 목사들, 생활이 어려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고 생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갈 수 없는데 우리는 5일만 참석하면 되니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케냐에 가장 적합한 학교, 그 어떤 선교사도 이런 학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제가 머리가 좋아서 세운 학교가 아닙니다. 근 100년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이 왔었고 22개의 부족말로 성경이 번역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 만큼 활발하게 선교를 해 왔습니다. 마하나임 바이블 칼리지는 연구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얻어진 것입니다. 수천, 수만명의 아프리카 선교사들이 다녀갔지만 이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신학교를 하기 위해 하루 종일 수업을 하려면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달에 한 주간만 하자고 해서 만들어진 학교였습니다. 케냐의 목회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신학교, 이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아서 만들어진 학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영감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마음을 받아서 하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교회와 상합하여 자기 감각을 버리는 법을 배워야 
    여러분의 감각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감각 없는 자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신앙을 통해 자기 감각을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 감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감각이 와서 제대로 내 모습도, 신앙의 상태도, 옳고 그름도 정확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연락하고 상합하고 마음을 나누지 않기 때문에 자기 감각을 버릴 줄 몰라 여전히 자기 감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연락하고 상합하고 이 교회 안에서 마음을 나누다 보면 자기 감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실패한 자가 되고, 무너진 자가 되어서 자기의 지혜도 버리고, 자기의 열심도 버리고, 자기 방법, 수단도 버려서 하나님의 것을 받아서 사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런데 자꾸 회복하려고 하고 잘해 보려고 합니다. 쉽게 자기 감각이 버려지지 않습니다. 모세를 보면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모세에게 영감이 없었습니다. 모세에게 들어진 그 마음 말고 하나님은 당신의 영감을 통해서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감 없이 자기 감각으로 히브리인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결국 그 일이 실패 했고 바로의 공주 아들의 위치에서부터 버려져 살인자가 되었고 망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에 하나님은 실패하게 했고 예수님을 향하여 저주하고 고통가운데로 몰아가셨습니다. 신앙을 하다 보면 그 마음의 세계를 봅니다. 자기 마음에 들어지는 감각을 버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 하는 생각이 들면 절대로 그 생각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수영 하는 법을 못 배운 사람은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듯이 자기 감각을 버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신앙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감각으로 사는 것 자체가 망하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교회와 진리를 찾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전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자기 기준에 의해서, 자기에게 맞는 교회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자기 감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자기 감각을 버리면 감각 있는 자가 되어 집니다. 의사가 암이라고 선고를 해도 그것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 그 통증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늦어 버린 사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내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의를 버렸을 때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여러분의 의를 더 완전하게 만들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내 감각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감각이 오지 않습니다. 감각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감각을 가가지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감각이 죽은 자이기에 버려져야 합니다. 내 감각이 아닌 영적 감각을 교회로부터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교회와 멀어져 있고 교회와 연락하고 상합되어지지 않으면 점점 죄악 된 방향으로 가면서도 여전히 감각 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 사람의 삶은 한 부분만 문제가 아니라 그 삶에 있어 타락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 감각을 가지고 살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욕심으로 더러운 것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계속 지으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내 마음에 어떻게 감각되어지느냐, 그것으로 사는 것 자체가 망하는 길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감각 말고, 교회의 감각이 필요하고 주님의 감각, 말씀의 감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 감각을 믿지 않게 하려고 실수, 허물, 망하게도 하고 안 되게도 합니다. 자기 감각을 믿는 사람이 안 되고, 망하고, 악이 드러날 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참 좋은 것입니다. 뭍이 드러난 땅처럼 내 감각을 믿지 않고 버릴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변명하고 가리고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은 여러분의 감각을 버리게 하려고 망하게, 실패하게, 안되게 합니다. 여러분의 감각이 버려지게 되면 하나님은 당신의 큰 뜻을 펼쳐 가실 수 있습니다.

     

    내 감각을 사용할수록 미련한 자가 되어 
    요셉의 청지기, 자기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 주인이 시키는 일이 부당하게 여겨집니다. 요셉의 형들이 정탐도 아니며, 도둑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감각을 가지면 요셉의 큰 뜻이 펼쳐질 수 없습니다. 요셉이 그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숨겨 놓았습니다. 요셉이 언제 은잔을 가지고 점을 쳤습니까? 그 청지기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요셉 청지기의 보았을 때 자기 감각을 가지면 요셉이 거짓말하는 자로 보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큰 뜻을 펼쳐 가는데 요셉이 부당한 일을 하고 있고 부정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감각을 가지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암을 느끼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와 같습니다. 여러분의 감각은 이미 죽어 버렸고 죄악에 물든 감각입니다. 그 감각을 사용 하면 할수록 미련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감각이 버려진 자, 요셉의 청지기, 베드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가 자기 감각을 버리고 사울에게 찾아갑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런 인물들을 통해서 자기 감각을 버린 자와 버리지 못한 자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도덕적인 기준으로, 선악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에 잡혀 살면 가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대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내 감각을 가지고 살면 가인처럼 대적이 될 수밖에 없고 방탕에 방임하며 모든 것을 욕심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감각을 받아들여야 하고, 교회와 종, 말씀의 감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비추어 보고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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