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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옥 | 2015.03.17 13:28 | 조회 10284

    2015년 3월 15일 주일오전말씀
    말씀: 마26:36~46

     

     

    순종을 넘어 복종의 삶으로

     

     

    서방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베넹  
    근간에 베넹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우리를 소망스럽게 하고 우리 마음에 큰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베넹이라는 나라는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 중에서도 가난한 나라에 속하여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공통점은 자원이 없기 때문에 서방에서 지원을 해 주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 유일하게 실내 체육관이 있는 나라가 케냐입니다. 중국에서 투자를 해서 다 지어 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케냐의 국가사업들을 도맡아서 일을 합니다. 투자를 할 때는 얻어 갈 것이 있기에 그것을 바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자원이 없는 나라에는 관심이나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베넹이 그렇습니다.

     

    베넹과 IYF가 만나서 부르는 새 노래 
    베넹에 청소년들을 위해서 청소년센터, 학교, 병원, 방송국 등을 지으려고 합니다. 베넹 대통령 아들이 우리나라에 방문해서 IYF가 활동하는 것을 보고 청소년 센터를 베넹에 세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번에 베넹 대통령과 함께 기공식, 면담을 자세하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무 관심이 없었던 나라, 특히 청소년들을 위해 그 나라에 IYF와 박목사님이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박목사님으로부터 얻어지는 큰 덩어리, 스와질랜드를 다녀오시면서 교육부 장관과 협의가 되어서 4월말에 그 나라 교사들 500명, 500명 두 차례를 통해 마인드 교육을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코트디부아르에 가셨는데 M.O.U를 통해서 마인드 교육을 하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일들 
    지난 번 독일에서 사역자 마인드 강사 훈련을 했습니다. 영어로 강연을 할 수 있는 강사가 필요한데 한국에서 그 자원을 찾으려고 하니까 많지가 않았습니다. 해외에는 그런 자원들이 많기에 하나님이 계속해서 새로운 일들을 주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예비해 놓은 것은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 일이 선교회와 우리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분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예비해 놓았는데 누구를 통해서 나타납니까?

     

    말씀의 수정과 착상
    ‘사내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 있어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가졌던 마리아가 천사의 교제를 통해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말씀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달려가서 교제를 함으로 그 마음에 충만함을 얻었습니다. 어제 장년회에서 이 말씀을 세밀하게 구분 지어서 이야기 드렸습니다. 잉태하고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되면 임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수정란이 착상이 되어졌을 때 엄마 몸으로부터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고 자라서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생명을 낳기 위해서 수정과 착상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치 수정과 같으며, 착상이라는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교제함으로 충만함을 얻었던 것처럼 교회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마음을 나누고 그 마음이 흘러가고 교류가 될 때 생명으로 자랄 수 있고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내 마음이 만나서 수정이 되는 것과 수정이 되고 난 이후에 착상이 되는 것을 사단이 방해하기 위해서 종의 말씀에 대해서 그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여 수정하지 못하게 하며,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여 말씀이 착상이 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 마음에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 자기 생각과 판단이 버려지지 않는 사람,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 그곳에서 회개하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그 말씀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수정이 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서 세포 분열이 일어납니다. 잉태가 된다는 것은 수정란이 착상이 되어져야 합니다. 엄마의 자궁에 착상이 되기 위해서는 대략 5~7일이 필요합니다. 분열이 일어나는 수정란이 착상이 되기 않으면 생명으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임신을 했다가 유산을 했다는 것은 자궁벽에서 떨어졌기에 생명으로 자랄 수 없고 생명을 탄생시킬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착상 될 수 없는 나 홀로 신앙  
    말씀을 내 안에서 깨닫고 받아들이면 이는 수정된 것과 같습니다. 교회와 마음이 연결되어지고 교류가 되지 않으면 말씀을 받아들여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변화가 없는 나를 보게 됩니다. 분명하게 말씀을 받아들였음에도 내 삶에 변화가 없고 역사가 없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교회와 그 마음이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그 마음이 착상이 되지 않으면 생명으로 자랄 날 수 없고 역사와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나 홀로 신앙, 내가 깨닫고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잉태된 것이 아니고 수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잉태되었다는 것은 수정란이 착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잉태가 아닌 수정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이 그 마음에 수정되어지는 것, 말씀과 내 마음이 만나는 것을 막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주어서 교회와 그 마음이 교류가 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교회를 신뢰하는 마음을 무너트려서 교회를 무시하고 교회를 향하여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하면서 자기만의 신앙을 하는 그 길로 내어버려 둡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숨겨두신 놀라운 비밀
     오늘 날 수 없이 많은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내 삶에 변화와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은 그 마음에 틀림없이 교회를 향하여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전부가 아닙니다. 이 교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살았습니다. 그가 주막이라는 교회와 연결이 되어져서 공급을 받지 않으면 그는 견고히 세움을 입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만난 것이 수정이라면 주막에 가서 돌보심을 받는 것을 착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도 그렇습니다. 오늘 날 현대인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판단과 자기를 꺾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려고만 합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면 안되냐?, 말씀을 듣고 내 생각을 버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되지 않느냐? 굳이 교회에 가서 간증하고 마음을 꺾고 살아가야 하느냐?...,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주의 일하심과 은혜와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변화가 없습니다. 그 마음이 교만해져서 교회와 지체를 무시하고 함께하지 않는 그 마음이 분명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 신앙, 내 말씀, 내 믿음…,그렇게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신앙하도록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정확하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마음이 교회와도 연결되어져서 그 마음의 흐름과 교제를 통해서 흘러 받아야 합니다. 생명의 역사, 하나님의 능력이 정확한 하나님의 영적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도우심의 간증이 없는 이유는
     오늘 날 사람들이 말씀만 믿으면 되는 줄 알고 말씀만 들으면 되는 줄 알지만 신앙의 중요성과 교회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주일 낮 교인들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은 법으로 억지로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을 따라갈 때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으로 그 마음이 충만할 수 있지만 나 홀로 신앙이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도우셨다는 간증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교회에서는 자기 생각과 판단을 버리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했는데 왜 내게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모습을 보며 갈등에서 시작하여 그 나중에는 불신으로 그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그 법칙이 간단 명료합니다. 그 법칙이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그 마음을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오미의 마음이 베들레헴과 연결되어졌듯이  
    어느 날 나오미의 마음에 자기 생각을 믿고 자기 판단을 따라서 사는 삶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던 나오미, 사사 시대에 자기 소견의 옳은대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모압에 가서 다 망하고 나서 어느 날 주의 마음이 그 마음에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양식을 주셨다는 것을 들으면서 자기 생각과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베들레헴으로 옮겨 갔습니다. 주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할찌라도 모압에 나오미가 머무르고 있었다면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그가 돌아갔고 정확하게 그 마음이 베들레헴과 연결이 되어졌습니다.

     

     룻 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말씀 앞에서 자기 악한 것이 보이고 그곳에서 그 마음을 돌이킵니다. 때로 안 풀어져서 교제를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고 교제를 해 달라고 합니다. 교회는 부담스럽고 저 앞에 와서 교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오미가 교회 앞에 간증하듯이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되어져 있습니다. 나오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수정이 되어졌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이 틀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마음을 깨닫고 베들레헴에서 조용히 숨어 지낸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과 베들레헴과 정확하게 연결시켰습니다. 영적으로 교회와 그 마음이 착상이 된 것입니다.

     

    교회에 마음을 나타내고 연결되어지는 과정 
    교회 앞에 내 마음을 이야기하면 무시 받을 것 같고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말씀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어리석고 미련하고 악했고 말씀의 판단을 믿지 않았던 나, 이 마음을 나타내고 교회와 연결이 되지는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오미에게 만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 와서 말씀을 깨닫고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로부터 공급받는 마음  
    들 나귀의 삶, 성읍의 지꺼리는 소리를 업신여기고 어거하는 자의 소리를 무시하는 삶, 그 삶에 형통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면 견고하게 서게 되고 그 선지자를 신뢰하면 형통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그 마음이 착상이 되어졌을 때에 비로서 가능합니다. 교회 앞에 내 마음을 드러내고 그 마음을 꺾고 그 마음을 흘러 받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 그 맛을 보지 못하였기에 교회를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교회가 없으면 생명의 역사와 말씀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수정이 되어도 늘 흘러 떠나가 버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자라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교회와 연결시켜야 합니다. 교회 앞에 내 마음을 드러내고 간증하고 그 마음이 연결되어져서 교회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세계를 맛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교회가 다가 아니기에 교회의 섭리와 하나님의 법칙 앞에 교회로부터 공급을 받게 됩니다.

     

    교회와 연결되지 못하도록 사단이 넣어 둔 ‘옳음’ 
    사단은 말씀을 받아들여도 그 다음 단계, 착상되는 이 단계를 못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막아 놓았습니다. 그 마음을 조금만 교만하게, 조금만 높여 놓게 하여 착상이 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 교회와 연결되어지는 단계를 막으려고 문제를 하나 넣어 둡니다. 옳음, 그 마음에 넣어 주어서 그 옳음이 교회를 무시하고 지체를 업신여기고 교회와 착상된 삶을 끊어 버립니다. 사단이 옳음을 넣어 주어서 그 마음이 착상되지 못하도록 막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반대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을 내립니다. 사사 시대에는 자기의 옳음에 잡혀서 옳음을 따라 행하며 살아갔습니다. 나오미의 삶에도 옳음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오늘 날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교통사고도 그 옳음을 따라서 판단합니다. 교통사고가 일방적으로 판결이 나는 경우가 드뭅니다. 자기 과실이 10% 만 옳아도 자기 옳음을 끝까지 주장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많이 개선이 되었지만 필리핀은 아직도 싸우고 있습니다. 마닐라 시내에는 차가 막히는데 교통사고가 나면 차가 막히든 말든 끝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사단이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는 ‘순종’의 단계
    구원은 받았지만 사는 것은 옳음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교회가 하는 일이 불평하고 원망을 하면서도 자기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순종 되어지는 단계, 어머니 나오미를 위해서 룻이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삽니다. 구원을 받고 옳음 가운데 살다가 이제는 복음이 귀하고 생명의 역사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며 물질로, 봉사로, 수고로, 내 삶과 젊음도 드립니다. 그런 삶을 사고 있지만 그 삶 속에 사단이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는 것은 옳음 하나를 주어서 교회와의 연결을 끊어 놓습니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옳음 
    옳음을 버리는 삶, 인간에는 옳음이 없습니다. 100%로 완전한 옳음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옳은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남편이 교회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판단한다면 어떤 남편이 그렇습니까? 가정에서 판단 받을 것이 엄청 많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아내가 냉정하게 판결을 내려본다면 가정에서 잘 하지도 못하면서…, ‘니나 잘해라…’, 하나님 앞에서 볼 때 내가 판단하는 것이 옳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내가 볼 때도 그렇고, 인간이 볼 때도 그러한데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이 옳음도 그러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나름대로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도 사단은 얼마든지 옳음 하나를 넣어 줄 수 있습니다. 그 옳음이 교회를 판단하게 하며 종을 무시하는 삶으로 이끌어 가기에 결코 그 사람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옳음이 작용하지 못하는 ‘복종’의 단계 
    하나님의 처방, 룻기 3장입니다. 4절~5절,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룻에게 좋은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음란한 여자로, 잘못하면 그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복종 되어지는 삶, 그 옳음을 끊어 낼 수가 있습니다. 순종의 단계를 넘어 이해가 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충만하지 않고 그 일이 하기 싫더라도 그 마음을 꺾고 가야 하는 세계, 복종의 단계입니다. 그 옳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 그 옳음이 자리를 잡지 않는 사람, 이 복종의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작용되지 않습니다. 옳음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원망과 불평을 만들어지게 되어 있고, 그 마음이 더 진행되어지면 불신을 낳게 됩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이 마음을 받아들이면 내가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말씀을 받아들이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다른 씨, 그리고 다른 열매…, 이는 옳음을 받아 들였을 때 일어나게 됩니다. 옳음이 잉태되어져서 불신을 낳고 대적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끌어 주려고 하는 복종의 단계에 그 마음이 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더 큰 옳음을 만들어 내고 
    순종으로, 희생과 헌신으로 더 큰 옳음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복종의 단계에서는 옳음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신앙의 한계, 순종에서 복종으로 넘어가는 문입니다. 옳음이 가득 차 있기에 입만 열면 옳음이 나오고 서운하고 섭섭하고 불신스러운 이야기만 그 입에서 나옵니다. 그 마음에 옳음이 잉태 되어져서 원망과 불평을 낳고 불신이 되어 대적이 됩니다.

     

    복종의 단계에서 얻는 풍성함 
    룻기 2장에서 룻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순종하고 봉사하며 살아가지만 그 삶을 가지고 겨울을 날 수 없고 그 다음 이삭을 줍기까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온전한 양식이 되지 않습니다. 룻기 3장에서 복종의 단계에서 그는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 삶이 그를 지킬 수 있으며 온전한 삶으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기 만이 아니라 그 풍성함으로 교회도, 주변 사람도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보여주시는 복종의 신앙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서 어떤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좋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다른 그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은 고난의 십자가의 잔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 마음, 그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마음을 혼자 속으로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것은 예수님이 복종하는 신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기도를 하면서 주여, 나도 이 잔을 원하고 주의 뜻대로 이 잔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내 원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 앞에 복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의 죽으시는 장면을 통해서 신앙이라는 것, 복종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영적인 옳음도 버려져야 하는 온전한 복종 
    베드로가 깊은데로 가서 물고기를 잡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이는 순종입니다. 그 마음이 일어났고 배와 부친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 또한 복종 앞에서 신앙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영적인 옳음도 버려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모세가 깨어버린 느후스단, 분명 놋뱀을 통해서 역사가 일어났지만 분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깨어 버렸습니다. 내가 악한 것이 발견되어져서 버려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 옳음과 원함도, 심지어 내 영적인 옳음도 버려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도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는 그 영적인 일을 버리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영적인 옳음도 버려져야 하는 온전한 복종, 참된 신앙을 말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5~6)

     

    복종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영적이고 신령한 세계
    예수님이 가지신 원함도 옳음도 다 버려졌습니다. 죄악 중에 출생한 인간에서 오는 옳음은 당연히 버려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온전히 복종 되어지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사단은 끊임없이 그 사람의 마음에 옳음을 넣어 줍니다. 순종을 배워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하여도 사단은 그 사람에게 옳음을 넣어주기가 더 쉽습니다. 이 중에도 한 때 복음을 향하여 힘 있게 살아가다가 적당히 살아가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분명 그 마음에 옳음이 있을 것입니다. 옳음을 버리기에 앞서 그 신앙이 순종의 영역에서 있기 때문입니다. 대적하는 사람, 옳음의 열매입니다. 그 신앙은 순종의 영역에서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불신하게 만들고 대적하게 만듭니다. 복종의 영역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내 마음에 감사한 마음, 충만한 마음을 가지고 이대로 살면 되는 줄 알지만 이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가셨던 그 신앙, 복종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복종의 영역에서는 사단은 어떠한 옳음도 넣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구원을 받고 나서 교회 앞에 복음이 좋아서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를 하며 살아온 삶에서 멀어져 적당히 살아가고 있다면, 그 옳음을 사단이 넣어 주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옳음을 풀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의 영역에서 가서 보면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했는지가 보여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종의 영역에 들어가셔서 내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원치 아니하여도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을 해야 합니다. 그 삶을 살 때, 우리로서 갈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영적이고 신령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복종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2:5~8)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그 길,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 길을 가야 하는 이유, 그 뒤의 삶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순종의 영역에서 후회하고 앉아 있어봐야 해결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헌신하고 충성할수록 사단은 더 큰 옳음을 만들어서 더 큰 불신과 대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사단은 그 영역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고 얼마든지 붙들어 둘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어둠을 끼치는 자로 만들어 놓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지난 삶을 후회하고 앞으로의 삶에 겁을 냅니다. 이삭을 주운 것으로 결코 풍족함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삭을 풍족히 주었다 할찌라도 그것은 결국 곤핍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복종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여러분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그 이름을 높일 수 있으며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이는 순종의 영역에서 복종의 영역으로 옮겨 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복종의 영역에 갔을 때 그를 지극히 높이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이 애를 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동일하게 일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가보지 아니한 영역, 그 영역에 가면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제 삶 속에도 순수하게 교회 앞에 순종하고 따른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다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는 복종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고, 납득이 가지 아니하여도, 옳음이 있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것처럼 복종의 길로 그 영역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역자라도 복종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대적이 되는 것을 봅니다. 어리석게 순종의 영역에서 해온 신앙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모든 일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나님이 근간에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제게 전세계를 누비면서 복음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고 있습니다. 유럽에 갔다 왔고, 4월에는 일본에, 인도, 남미, 아프리카, 러시아…, 시간을 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한국에서는 2박 3일 단기 코스로 마인드 강사 훈련을 하니까 기회를 달라고 여기저기에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복종의 영역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모든 일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던 것처럼 순종의 영역에서 갈등하지 마시고, 그 안에서 반복된 삶을 살지 마시고 새로운 복종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귀한 역사와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둠, 불평, 원망이 없는 복종의 영역으로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45~46)

     

     순종의 영역에서 옳음 하나에 붙잡혀 주저앉아 있는 여러분을 향하여 일어나 함께 가자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옳음에 사로 잡혀서 고통하고 대적하는 어둠 가운데 있지 말고 어둠이 조금도 없고, 불평, 원망이 없는 주님이 가시자고 하는 영역, 복종의 영역에서 그가 영광스럽게 하며 영광만 있는 자리로 가자고 하십니다. 왜 여러분의 삶에서 영광이 떠났습니까? 발버둥 치면 칠수록 늪에 빠져 가는 것처럼 옳음 속에서, 옳고 그름에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어둠이 조금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축복만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합니다. 사단이 틈탈 수밖에 없는 영역, 주를 위해 살았다는 그것 때문에 원망과 불신이 그 마음에 자라 대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그 곳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만이,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남아 있는 그 곳, 순종하는 삶이 아닌 복종하는 삶으로, 새로운 신앙의 영역으로 함께 가자고 합니다. 죄 없이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도 원함이 있으셨지만 그 원함도 꺾으셨고 부인하였던 것처럼 그 삶을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고 그 길을 함께 걷고 싶으셨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바는 일어나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영광이 그 삶에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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