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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아침 | 2013.05.14 23:34 | 조회 15729

    날짜 : 2013414

    본문 : 사도행전 1536~41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과 헤어짐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 다툼을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두 사람이 복음을 위해 달려가다가 갈라섰습니다. 바나바는 영적인 사람이었고 사도 바울을 많이 이끌어줬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바나바를 소개할 때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나바가 구원받은 후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행전에 432절을 보면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그냥 구원받고 신앙을 하는 삶이 아니라 바나바가 믿음의 삶을 살고 성령의 흐름을 따라서 흘러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밭이 있는데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이 구절 이후에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옵니다. 바나바는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질로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부분도 복음의 진보에 유익한 일도 했습니다. 114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이고 바나바를 소개할 때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자라고 소개합니다. 인간적으로 봐도 도리와 경우가 있고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바나바를 통해 많은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 사도 바울이 구원받기 전부터 바나바는 믿음의 삶을 살았고 복음을 위해 산다고 살았습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 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우리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자칭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일컬음 받는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어주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을 알고 그 삶을 아는데. 그들을 보고 이 사람들 하는 일을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랑 똑 닮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컫습니다. 처음 안디옥에서 일컬음을 받게 되어있다고 나와있습니다.

     

    사도바울을 이끌어준 바나바의 삶

     

    사울이 구원받고 다메섹에 도착했습니다. 제자들과 사귀려 하는데 제자들이 다 그를 두려워하여 제자가 된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핍박자이고 훼방자이며 복음전도자를 잡아가는 사람이며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 찬성표를 던진 사람이니 믿지 못하고 위장전입을 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 두려워하여 믿지 않는다고 했는데 바나바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고장에서 주를 만나고 구원을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르는데 바나바는 영적인 분별력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힘있게 전하니 핍박이 일어납니다. 29절에 또 주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다서로 보내니라 .형제들이 여기서 가이사랴로 데려가서 다서로 보냈는데 이렇게 우리 복음 전하고 있는데 복음 들은지 얼마 안된 바울이 와서 뒤집어 놓으니까 보내버린것입니다. 다서에 복음 전하라고 보낸 게 아닙니다. 그리고 보내놓고 아무도 복을을 위해서 불러주지 않는 것입니다. 다서라는 지역에 가서 바울을 다시 불러다가 복음의 일을 할 수 있게 이끌어준 것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의 삶을 보면 구원받은 후에 믿음의 삶을 배우고 물질을 적극적으로 드리고 힘있게 복음 전하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습니다. 영적인 분별력도 있어서 바울을 교회에 소개하고 바울을 다서로 보내버린후에 하나님 일하시길 원하신다는 걸 보고 사울을 다시 불러주고, 바나바와 사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5장에서 바나바 입장에서 봤을 때 사도 바울을 교회에 소개하고 복음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 잘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사역을 잘 모르는 그에게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전엔 복음만 전하고 다녔는데 양육할 수 있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 걸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15장에서 바나바와 싸우고 갈라선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적으로는 배은망덕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두 삶이 갈라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이건 그냥 다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봐야하는 영적인 세계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결과를 보면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수리아와 길르기아로 다녀가면서 교회들을 굳게 했는데 바울의 삶은 16-19장 계속 이어지면서 그를 통해 역사가 일어나고 수많은 서신서도 기록되고 많은 목회서신이 기록되였습니다. 또한 목회자도 양성하고 왕들에게 복음 전하는 삶도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이 용납하지 않은 마가요한

     

    우리가 방금 읽은 사도행전의 이 짧은 글 속에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양보하지 않았을까? 마가요한을 데려갈 수도 있는데 왜 데려가지 않았을까? 왜 갈라설 정도로 이 부분에 있어서 바울이 양보하지 않았을까? 마가 요한은 데려갈 수도 있는데 왜 데려가지 않고 피차 갈라섰을까? 마가요한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를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 성으로 다시 돌아가서 양육하는 부분에는 서로 동의를 했습니다. 다시 가서 이끌어주고 양육하자는 부분은 동의를 했는데 (사도행전 15:37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도~피차 갈라서니) 결국 이 싸움은 마가요한 때문에 일어난 싸움입니다. 마가 요한을 데려가느냐 마느냐. 사도 바울은 이 사람을 데려가면 안된다고 하고 바나바는 데려가자고 합니다. 마가 요한이 왜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했을까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길에 마가요한이 따라다니다가 밤빌리아에서는 돌아갔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일을 굉장히 크게 여기면서 그 사람을 다시 데려갈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나바와 다투게 되고 이 일로 갈라서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 다투면서까지 데려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복음을 같이 전하러 다니다가 마가 요한이 왜 떠났는지 사도행전 13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고 복음 일을 할 수 있도록 보내는데 이때 바울 곁에 마가 요한을 수종자로 두어서 복음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온 섬을 지나 바보에 이르러(13:6) 그 곳의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이 있었는데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는데 엘르마가 방해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바울이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하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총독이 이게 참 신이며 이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하고 바울을 불러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 기이히 여기며 온 맘을 다 열었습니다. 13절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마가 요한이 여기서 사도바울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을 찾아서 정확히 찾아보기 전에는' 마가 요한이 핍박 당하기 싫고 어려움 당하기 싫어서 떠났는가보다. 사도 바울 따라다니면 늘 핍박받아야되니까. 그게 싫어서 돌아갔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3장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핍박 받았습니까? 감옥에 갔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였는지 오늘 읽어드렸습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박수 하나가 총독으로 못 믿게 하려고 방해하다가 소경되서 나가떨어진 일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사도바울을 향하여 마음을 다 열고 말씀에도 열고 가르침을 받는겁니다. 이건 어려움도 핍박도 아닌데 마가요한이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마가 요한을 절대로 다시 데려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마인드 강연을 하다보면 마인드강연에서 신앙을 접목하지 않으면 절대 깊이 들어갈 수 없고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마인드 강연이란 것은 수준 낮춰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나타난 마음의 세계의 단계들을 더 쉽게 풀어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더 정밀하고 정확하게 마음의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신앙의 수준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잘 깨닫느냐 그게 아닙니다. 구원 받은지 몇 년 됐느냐 이것도 신앙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럼 신앙의 수준은 뭘로 결정됩니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노래하는 것 한번만 들어보면 합창단의 노래 수준과 연주 수준을 압니다. 대전 음악학교에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선생님들이 와서 가르쳐주는데 러시아에서도 오니까 우리나라 교수님들이 연주를 안하려 한답니다. 러시아 선생님들 워낙 수준이 높으니까 거기서 연주하면 실력이 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연주 안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교수라도 러시아 음악인들 앞에 서면 수준이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칩니다. 신앙이란 건 구원년수도 아니고 교회안에 쓰임받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면에 있는 겁니다. 내면에서 신앙수준 끌어올려놓지 않으면 신앙도 힘들고 피곤해지고 결국은 신앙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교회 나오고 봉사하고 따라가고 함께 가고 있다고 그걸 내 신앙의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영적인 수준이 어디 있는가를 보고 한 단계씩 발전시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알아야합니다. 그것을 안해놓고 신앙을 십년 이십년 지나보면 나중에 가면 기초부실건물이 되는겁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건물증축때 마음껏 올릴 수 있지만 기초가 안되 있으면 하중이 더해질수록 불안합니다. 신앙을 하면 할수록 불안정한 신앙인이 되느냐 신앙을 쌓아가도 더 견고해지고 더 힘있는 신앙이 되느냐 그것입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의 신앙의 수준

     

    바나바가 15장에서 바울과 갈라서면서 구브로로 갑니다.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수리아와 길르기아로 갑니다. 바나바에게 구브로는 굉장히 뜻깊은 도시입니다. 436절에 나오기를 바나바는 구브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하고 갈라서고 고향으로 간것입니다. 마가 요한은 그의 생질이었습니다. 자기 생질이었기 때문에 바나바 마음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게 안되니까 바울을 떠나서 구브로로 간 것인데 결국 교회를 떠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라를 택하고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의 부탐함을 받고 떠났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부탁함을 받고 다니면서 교회를 굳게하는 일을 합니다. 그럼 누가 교회를 떠난겁니까? 바나바는 성령 믿음이 충만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떠나고 나서 16장부터는 바나바의 행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행적만 나오는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가서 복음도 전하고 루디아가 구원을 받고 빌립보 교회가 생겨나고 빌립보 교회 간수가 구원받고 교회가 형성되면서 바울을 통해서 복음역사가 계속 힘있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마가 요한을 통한 역사는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왜 성령이 충만했던 바나바를 통한 역사는 끝이 나고 사도 바울에 대한 역사는 계속해서 일어납니까? 이건 교회의 비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복음을 향해 힘있게 달려오다가 왜 여기서 무너져야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건 신앙의 수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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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수준

    1.부담을 피하는 사람

    2.교회가 가는 길에 함께 가며 부담을 넘은 후 머무르는 사람

    3.부담을 계속해서 넘는 사람 - 억지로 부담을 넘는 사람

    - 부담을 즐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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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나바가 마가요한을 용납하고 허락하는 순간 영적인 삶이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 요한을 용납하면 망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싫고 부담스럽지만 계속 부담을 넘어가지 않으면 망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냥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첫번째 부담을 넘지 않는 사람은 롯의 삶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요단들로 부담을 피해서 갔지만 롯의 삶이 그로 인해 망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야곱의 삶을 보니까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얘기합니다. 왜 그 험악한 삶을 보냈냐 하면은 창 33:16에 야곱이 에서라는 큰 부담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짐승들과 자신을 위해 숙곳에서 장막을 치고 세겜성에서 은 일백개로 밭을 샀습니다. 에서라는 큰 부담을 넘고 쉬고 머무려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두번째 수준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부담을 넘은 후에 머무르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 딸 디나가 그 땅 사람들은 어떻게 치장하고 사는가 보러 갔다가 강간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게 다 야곱이 부담을 넘은 후 머물려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야곱의 신앙의 수준이 두 번째 밖에 와있지 않은것입니다. 바로왕 앞에 섰을 때 그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이야기 합니다. 부담을 계속 넘지 않는 사람은 망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육신적으로 흘러갑니다. 부담을 계속 넘다보면 억지로 부담을 넘는 것이 아니라 부담을 즐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부담을 즐긴다는 것은 부담을 넘을 마음을 가지고 즐기는 삶을 살 때 새로운 일들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에도 이런 마인드가 되면 새로운 장이 열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새로은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구원받고 교회에서 신앙하다보면 하나님이 복 주실텐데 왜 내 삶이 이렇느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는 복 중에 이런 마음의 세계, 이 마인드만 하나 가지면 지금 아무것도 없고 땡전 한 푼 없어도 얼마든지 새로운 일들을 창출해 나갈 수 있습니다.

     

    부담을 즐기고 뛰어넘는 신앙

     

    혹시 사막 마라톤 하는 대학생 이야기 들어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친구가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려면 사하라 고비 그리고 남미 어느 사막과 남극을 횡단해야 되는데 사막 갈 때는 간편한 복장에 배낭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남극을 갈 때는 장비가 필요한 겁니다. 땀이 배출이 안되고 젖으면 큰일납니다. 뛸 때는 몰라도 쉴 때 기능성 옷이 없으면 안되고 또 신발이 없으면 안됩니다. 참가비만 천몇백만원이 든답니다. 비행기삯, 참가비, 기능성 장비들이 필요한데 대학생이 휴학했는데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부모님도 안주고. 아무것도 없는데 스폰서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아웃도어 전문 메이커들 다니면서 후원해달라고 찾아다니는겁니다. 그래서 보면 후원도 얻고 후원금도 받았습니다. 이 친구는 마인드가 됐습니다. 부담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넘을 마인드 가지니까 아무것도 없지만 다 얻어내는 것입니다. 부담을 피하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 부담은 안 넘고 은혜로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생각을 뜯어고쳐야합니다. 가장 큰 선물은 마지막 이 삼단계입니다. 그럼 신앙도 복되고 사업도 복됩니다. 이 마인드 형성이 되면 부담 넘는게 즐거운데 무슨 일이든 합니다. 부담을 피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결국 신앙이 안 되니까 삶도 안 되는 겁니다. 삶이 어렵고 안 된다는 것은 내 신앙의 수준이 낮다는 것입니다. 교회 백년 다녀도 늘 그런 수준의 삶밖에 못살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부담은 싫지만 안 넘으면 망하니까 부담 넘어 가는 삼단계 사람, 즐길 수 있는 사람, 그 맛을 알아야합니다. 그 단계에 가면 무슨 일을 하든 어떤 길을 가든 여러분 인생이 남들보다 앞서고 성공하는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바나바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다 할지라도 마가 요한을 용납하는 그 순간 그 길을 택하는 순간 바나바의 삶은 사도행전에서 지워지는 것입니다. 그를 통한 역사가 끝이 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지방에 한 형제님이 시험 들어서 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다른 목사님한테도 전화해서 목사님 솔직히 이야기해보세요. 솔직히 사역 힘들지 않습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주세요.’ 제가 뭐라 했냐면 형제 왜 신앙이 어렵냐. 사역이 왜 어려워. 뭐가 힘들어.’ 그날 집회하고 왔는데 사람들이 전단지 보고 왔다는 것입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였습니다. 너무나 소망스러웠습니다. 요즘 세상에 전단지 보고 오는 사람이 없다는데 그걸 받아보고 읽어보며 갑니다. 또 그걸 들고 와서 앉아있는 사람도 봤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 형제가 사역하기 힘들지 않습니까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힘들다고 말했답니다. 제가 머물러 있을 때는 또 부담 피할 때는 사역이 제게 부담의 연속이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세계를 넘고 나니까 부담스러울 게 없습니다.

    신앙을 하니까 부담스럽게 작정도 있고 세계대회도 있고 아티스트콘서트, 칸타타 왜 이리 행사가 많은지 또 때로 사역자들 떠나서 우리 교회 복음은 안 전하고 행사위주로 흘러간다고 하는데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복음 못 전하게 합니까? 우리 교회 온지 몇개월 안됐지만 집회 몇 번 했습니까? 누가 복음 전하지 못하게 합니까? 바빠서 시간 없습니까? 그런 말 하는 사역자는 저보다 안 바쁩니다. 저는 마인드 교육까지 합니다. 남들 안하는 일들 더 많이 하는데 복음 전할 시간은 많습니다. 결국 사역자라도 두번째 수준에 와 있으면 교회가 새로운 일들 하는 거 부담스러우니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냐 아니냐를 보고 그걸 이용해서 어떻게 복음 전할까 또 넘어서 어떻게 복음을 이야기 할것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오늘날 사람들 마음이 강팍해 진 것도 사실이고 영혼에 관심이 없고 복음 전하기 어렵고 견고한 진이 쳐져있지만 그걸 파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란 말입니다. 반드시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 사람들 마음을 깨트리려면 사단의 견고한 진을 깨뜨리려면 이것을 가지고 깨트려 나가면 되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난번 마인드 교육을 받으러 왔던 목사님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자긴 요즘 양로원도 가고 막 다니면서 마인드 강연 해보니까 너무 좋답니다. 이거 사람들 마음 열고 복음 전하는 도구로 참 좋다면서 말입니다.

     

    신앙이 망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

     

    오늘 여러분 마음이 그냥 교회를 얼마나 다녔냐 말고 신앙수준이 어디 와있는지 보고 한단계씩 진행이 안되면 신앙이 망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결국 교회를 대적한다는 걸 알아야합니다 바나바가 그렇게 충만했던 자인데 그가 하는 일이 복음 진보를 가로막는 일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계속 바울과 같이 복음의 일을 했다면 사도 바울이 가는 곳에 역사가 일어나고 바나바가 가는 곳에 역사가 일어나고 얼마나 힘있게 일했겠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사도 바울이 사도로 인정을 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바나바에게 더 가있으니까 바울을 사도로 받아들이는 데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나바가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열두제자에 속하지 않았다 그런 말 하지 않앗지만 사람들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무말 안하고 가만히 있다고 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에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듯이 마가 요한을 용납하는 바나바과 용납치 않는 바울 다시 말해 2단계에 와 있는 바나바와 3단계에 와 있는 바울과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알면 나의 신앙 수준을 알수 있습니다. 또 사역자라 할지라도 이 수준에 와있으면 결국 망하고 대적이 됩니다.

     

    계속되는 복음의 역사들을 소망하며..

     

    얼마 전에 피지섬에 교회 개척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 새로운 지역 태평양 작은 섬에 선교사 파송이 되어서 땅끝까지 복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 맘이 순수하답니다. 우리가 두번째 단계에 와있으면 세계대회 안할겁니다. 돈도 많이 들고 뭐하려고 계속 합니까? 아닙니다. 우린 힘들고 어렵지만 계속해서 복음 앞에 한계와 부담을 넘어야 합니다. 도덕적 기준이 아닌 영적인 기준에서 여러분 마음 안에 계속 한계를 넘으며 도전하는가를 봐야합니다. 전화한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누가 복음 못 전하게 하냐. 마음껏 복음전할 수 있다. 복음 전해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형제입니다. 예전에 복음 전하다가 회사에서 시말서를 쓰라 했습니다. 점심시간에 사람들을 너무 괴롭게 해서 쟤 있으면 우리 일 못하겠다고 해서 말입니다. 이 형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써야되는지 물어보니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으라고 해서 불러주는 대로 적는데 이걸 보금이라고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너 이렇게 무식해서 복음자도 못 쓰냐고 했답니다. 비록 보금이라고 쓰지만 복음 전하고 예수님이 우리 죄 어떻게 사했는지 복음 전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복음을 사랑하는 형제였습니다. 제가 물어봤습니다. ‘지금 복음 전해? 전하고 있어?. 형제가 판단하고 비판하는 동안 그 마음 다 없어지지 않았어? 그 마음 다 어디 갔냐. 형제! 하나님 앞에 서면 뭐라고 할 거야? 다른 거 다 두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 복음 전하다 왔다 하는 게 하나님 앞에 가장 영광스러운 삶이야!’.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때 한 쪽 이야기만 들으면 그게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분 마음에 복음을 향한 마음이 없고 사람들을 봐도 복음 전할 마음 안 일어나면 그건 타락한것입니다. 다른 타락보다 적어도 내가 어떤 길로 가는 게 더 복음 전하고 복음 위해 살겠는지 계산하고 따져보시기바랍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한 발판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복음 전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고 교회가 복음 전하게 마음을 일으켜 주고 복음을 향해 달려가게 합니다. 그러면 이 교회를 발판 삼아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하는 겁니다. 바나바가 결국 두번째 단계에서 마가 요한을 택하는 그 단계 머물렀기 때문에 그 신앙 무너질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을 안다면 내가 부담스러워도 억지로라도 나가야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도 늘 부담이 싫은 사람이었지만 넘어가면서 또 새로운 일 할 거 없나 새 부담 없나 창출해가면서 계속 해나가고 싶은 마음이고. 그게 내 맘에 소망이 기쁨이 됩니다. 오늘 2번과 3번의 차이가 단순한 게 아니라 바나바와 바울의 차이구나란 것을 알았습니다. 사도행전15장에서 행적이 끝날 것이냐 아니면 계속해서 사도바울의 복음을 전한 행적이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하는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그 행적이 끝나버릴 수 있습니다. 어딘가에 살아는 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있겠지만 바나바를 통한 역사도 교회가 굳어진 이야기도 더 이상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 전한 역사와 교회를 굳게 한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 부분에 자신을 비춰보며 신앙을 하나하나 배워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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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1/6) 좋은아침 2013.02.17 16991
    40 [인천교회]김재홍목사 주일말씀(12/23) 이재필 2012.12.29 16356
    39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말씀(10/14) 나오미 2012.10.17 21419
    38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말씀(9/9) 나오미 2012.09.19 16292
    37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말씀(8/12) 나오미 2012.08.14 16153
    36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설교(7/8) 나오미 2012.07.11 19820
    35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설교(6/10) 나오미 2012.06.11 15695
    34 [인천교회]오성균 목사 주일설교(4/29) 온정란 2012.04.29 15190
    33 [인천교회]오성균 목사 주일설교(4/22) 온정란 2012.04.22 14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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