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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옥 | 2016.12.03 13:13 | 조회 6010

    20161127일 주일오전말씀

    말씀: 11:3244

     

    사랑의 섭리 안에서

     

    어제 인천에서 칸타타가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들은 3회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 칸타타 공연은 더 섬세해지고, 더 웅장해지고, 더 감동적인 무대와 공연으로 막을 올렸습니다. 곡 한 곡, 한 곡을 선정하고 진행되는 모든 것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초점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받으면서 억눌려 있는 삶, 마치 오늘 날 사람들이 절망과 형편과 문제에 억눌려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메시야가 와야 그 모든 것에 벗어날 수 있고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 하나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마르크트오버도르프에서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최고상을 받았었던 그 때 이야기를 잠깐 들었습니다. 합창단 한 명 한 명을 소개하시는 시간이 있었는데 슈퍼마켓 주인, 간호사, 교회 안에서 개 밥 주는 사람 등, 다른 합창단들이 깜짝 놀라워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였는데 어떻게 최고의 음을 낼 수 있는지 놀라워했습니다. 마치 드라마처럼, 영화를 만들어 될 정도로 감동적인 스토리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만가지로 도우시는 것을 봅니다.

     

    어제 공연 전에 목사님과 귀빈실에서 기도회를 하는데 저희 3회 공연에 4000명이 필요한데 우리 식구 1000명을 빼어도 3000명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소망스러웠습니다. 며칠 전에는 고려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사할린 교포 교회가 아니라 고려인 2, 3세들이 한국에 돈을 벌러 많이 옵니다. 한국에 와서 체류할 수 있는 정식 허가를 받기에 많은 분들이 한국에 옵니다. 고려인 목사님을 만나니까 아주 젊었습니다. 30대 초반, 한국 교회에서 신학을 시켜서 고려인 교회를 운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분을 얻으면 많은 고려인을 얻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예배 장소를 빌려 예배를 1시에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예배당을 빌려 줄 수 있고 얼마든지 그 분들을 모시고 복음을 전하고 수양회에도 초청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고려인들을 다 얻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매주 10명 이상, 인천에 5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고려인 2, 3세들이 한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소통하기 위해 교회를 나오시는데 이런 분들을 칸타타에 초청할 수 있었고 오늘 저녁 공연에 23명이 온다고 하는데 너무 감사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복음을 전하려고 보면 복음의 길이 무궁무진하게 열려져 있는 것을 봅니다. 한국에 앉아서 사할린 교포뿐만 아니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300만이 넘는 인천,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마음껏 복음을 외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17사단에 가서 마인드 교육을 할 것을 생각하며 너무 감사하고 논산 훈련소에도 마인드 교육을 하고 있고 복음 전할 일들이 너무 많아집니다. 요즘은 일반 교회 목사님들도 오십니다. 한 목사님은 우리 공연장 가까운데 계신 큰 교회의 목사님인데 오셨기에 인사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 뵙자고 했습니다. 복음을 알고 계신 분들, 박 목사님이 전하시는 복음이 맞고, 참이라 생각하고 게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서 행하시면 하나하나 길들을 열고 계시고 너무 소망스러운 일들을 주고 계십니다. 서울에서는 큰 빌딩을 사서 인근 교회를 연합하여 강북 쪽에 대학생들을 얻으려고 하는 큰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학교마다 기숙사가 부족하고 굿뉴스코 출신들도 서울에 직장을 잡으면 방을 얻는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이 분들을 다 모아서 복음을 전할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칸타타를 통해서 이렇게 큰 복음의 진보가 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초청하신 분들이 다 만족을 하시고 너무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돕고 길을 열고 계십니다.

     

    아담과 화와가 지은 죄, 인간이 지은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담을 향하여서 모든 사람을 다 망쳤고 사망이 이르렀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저주를 받아야 돼,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함에 있어서 가장 큰 기대는 믿음도 소망도 아니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그 중 믿음의 섭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한 것처럼 하나님의 믿음의 섭리가 있어 그 믿음을 배우며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요한복음 11장에서 믿음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는데 아프지만 나았다고 하며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했는데 나사로가 죽고 나니까 마리아, 마르다 역시 예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예수님이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찾아가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우시는 것을 보며 유대인들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면서 그 누구도, 아무도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많은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나사로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자 죽은 나사로를 살릴 것이라는 믿음을 아무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믿음을 가지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주여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까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던지어 졌을 것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 합니다. 믿음의 모양을 낼지언정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11:21~22)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르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11:23~27)

     

    정작 그 마음에 믿음이 없습니다. 늘 믿음을 가지고 믿음 편에 있었던 마리아,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11:32)

     

    인간의 믿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 소망을 가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 결론은 이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죽은 나사로, 썩어 냄새 나는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어찌 이 믿음이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한 분만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닥 날 수 없는 믿음, 예수님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가도 언제든지 내 믿음은 바닥이 날 수 있고 시험이 들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는 악한 인간입니다. 충만할 때는 죽는 데도, 감옥에도 함께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형편 앞에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날 갈 수 있는 인간이며 어느 한계까지는 따라가며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지만 나사로가 죽으니까 마르다, 마리아의 마음에 원망으로 그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많은 유대인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을 비웃고, 원망하고 불평하였지만 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나사로 본인의 믿음도 아니고 어떤 인간의 믿음도 개입이 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11:4)

     

    하나님의 영광, 그 믿음이 나사로의 것도, 마르다, 마리아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섞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었기에 가장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내 마음에 믿음이 하나도 없다, 내 삶 속에 주님이 일하시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었고, 그 믿음으로 되었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은 바닥이 날 수 있지만 예수님의 믿음은 바닥이 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그릇에 믿음도, 소망도 바닥이 날 수 있지만 사랑의 그릇은 바닥이 날 수 없습니다. 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넘치도록 부어 주시기 때문에 바닥이 날 수 없습니다. 내 믿음이 바닥이 나고, 소망이 바닥이 나도 예수님의 사랑의 그릇은 바닥이 나지 않습니다. 내 그릇을 보니까 바닥이 나있고 마르다, 마리아의 믿음의 그릇은 바닥이 나 있는데 예수님의 믿음의 그릇은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찾아와 주시고 이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그릇이 가득 차 있는 예수님이 오시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고 그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어제 칸타타 공연을 하는데 2층에 후원 받아 온 학생들이 얼마나 좋아하고 반응이 좋은지, 저도 올 해만 벌써 공연을 4번 관람을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닥이 나도 예수님의 그릇은 바닥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이를 시험들었다고 표현을 하는데 이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믿음의 그릇을 가져 오면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문제, 아무도 믿음이 없어서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려야 합니다. 가장 큰 소망은 내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그릇은 다 바닥이 났지만 예수님의 그릇은 바닥이 나지 않기에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게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에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속으로 통분히 여기셨던 예수님, 아무도 믿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11:33~35)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무덤에 가시고, 친히 나사로를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생각하면서 너무 감사합니다.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하였고 그 아들로 인하여서 영광을 얻게 함이라 하였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그때 와서 주님이 일을 하시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면서도 일을 하시고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어떤 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으로 인하여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면, 그가 마리아였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그 믿음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11:2~3)

     

    주님의 사랑, 모든 것을 다 덮습니다. 연약함도, 부족함도, 추한 것도 덮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심령에 통분히 여길 정도로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덮어 버리고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져야 할 마음, 내 모든 허물, 부족함, 연약함,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 덮어지고 주님이 내게 역사하신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믿음의 섭리, 믿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의 섭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섭리도 있으며, 소망의 섭리도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면 그 소망대로 되며,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대로 되며, 또한 그 중의 제일인 사랑의 섭리가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 조건 하나가, 사랑하시는 자가 여러분의 삶 속에 역사를 하고 능력을 베푸십니다. ‘나는 믿음이 없어서 안 돼’, 그러면 사랑의 섭리에 기대를 두십시오. 내 믿음이 다 바닥났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또 다른 사랑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섭리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사랑의 섭리입니다. 절대 바닥나지 않는 사랑의 섭리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육신적이고 죄악 된 삶을 살아간다 할 찌라도 사랑의 섭리에서 절대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섭리는 사단이 절대로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사단이 형편을 주어서 내 믿음을 다 바닥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예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섭리는 바닥나지 않습니다. 오늘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사랑의 섭리가 바닥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내가 연약하고 육신적이기에 이런 나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지 않을 거야, 그 생각에서 벗어나 그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의 오해, 통분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눈물을 엉뚱하게 받아들입니다. 눈물의 의미를 모릅니다. 무덤으로 가신 예수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11:35~39)

     

    이 과정 속을 보면 인간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 어떤 조건 때문에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누구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고 죽었기 때문에, 그 한 가지 조건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어떤 문제, 형편, 어려움, 나를 사랑하시는 조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 조건이 가장 중요하고 이 조건 하나 때문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사단은 그 사랑에 불신을 넣어줍니다. 나사로가 병들고, 죽고, 점점 더 형편이 어려워져 갈 때 사단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을 넣어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야기, 사랑에 대해서 그들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사랑 한계 안에서 그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슬피 우는 사람들, 예수님도 그 사람들 중 하나로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어 죽은 것을 보고 우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은 결국 원망과 불평으로 바뀝니다. 사랑하시는데 왜 어려움과 문제를 주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느냐고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대형마트에 가보면 싸게 판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서 그 입구에 할인해서 판매하는 상품을 진열해 놓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트에서 불필요하게 많이 장을 보게 됩니다. 누구나 속일 수밖에 없는 상술, 가격이 정말 싼지 비교를 해 보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무게를 줄입니다. 칸쵸,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코과자, 슈퍼에서 산 제품과 대형마트에서 산 제품의 개수가 틀립니다.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불신이 들어 버리면 내 믿음이 바닥이 나도 예수님의 사랑이 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소망도 잃어버립니다. 유일하게 기대둘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셨는데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누가 돌을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미리 돌을 옮겨 놓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살아나고 그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를 사랑의 섭리라 합니다. 믿음의 섭리, 이 믿음의 세계는 정말 놀라운 세계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쳤을 때, 죽은 나사로가 나오려고 애를 쓴 것이 아닙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38년 된 병자에게 하신 말씀은 말씀을 들을 때 내가 그 말씀을 받아서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로 걸어가게 하겠다는 주의 능력이기에 우리에게 쉼과 능력이 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

     

    이 두 말씀을 합쳐서 보면 결론적으로 진리는 아들이 무엇을 하는 것을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 말고, 주님이 38년된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말씀은 그 의미가 내가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할 때 주님이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주님이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저 편으로 건너가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섭리를 아는 사람은 내가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들리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서 진리를 알면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섭리를 발견한 사람은 그렇게 믿음의 길을 갑니다. 그 삶은 너무 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이 바닥이 났을 때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섭리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은 믿음의 섭리를 가르치시지만 그 보다 더 큰 것이 주의 사랑의 섭리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향하여서 인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는데 제자들에게 배척을 하면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떠나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분히 여기시더라도 떠나가지 않으시고 나사로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섭리 바탕 안에서 믿음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서커스단이 곡예를 하고 외줄타기를 할 때 그들이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밑에 안전그물이 펼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섭리를 배워서 믿음의 발을 내딛고 나가지만 안 되고 바닥이 나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섭리가 우리를 안전하게 받쳐 주고 있습니다. 떨어져도 다시 시도할 수 있고 다시 올라갑니다. 이 사람들은 외줄 타기를 배우고, 곡예를 배울 때 떨어지는 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또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우리는 사랑의 섭리 바탕에서 믿음의 섭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나에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겠다 합니다.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말씀의 판단만을 믿으면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시겠다 합니다. 말씀의 판단 하나를 믿으니까 내게 믿음이 오고 그 능력이 와서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이 죽었던 나사로,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태초에 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11:3)

     

    창세기 1장의 말씀으로 지어진 세계처럼 요한복음 11장에 똑 같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보다도 자기 생각과 판단을 믿기 때문에 천지를 창조한 능력의 역사가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날 수 없습니다. 38년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을 때 능력을 역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판단을 믿고 그 자리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해 주시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섭리를 발견한 자에게 역사하시는 믿음입니다. 이번에 대학생들이 칸타타를 앞두고 믿음의 발을 내딛었습니다. 지난번에 간사들을 책망했는데 믿음으로 안 하기에 오히려 후원보다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공연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대학생들을 통해서 얻게 되어졌습니다. 믿음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도 있지만 그 믿음이 다 바닥이 나도 사랑의 섭리가 주님의 뜻과 계획대로 나사로에게 찾아가 그를 일으키셨던 것처럼, 육신적인 나, 믿음이 없는 내게도 주님이 찾아오셔서 내게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사랑의 섭리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의 섭리 안에 보호 받고 있고 이 사랑의 섭리 안에서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도우시고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발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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