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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옥 | 2015.09.24 20:44 | 조회 8202

    2015년 9월 20일 주일오전말씀
    말씀: 고전14:1~19


    교회의 덕을 세울 때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법칙
    자기의 덕을 세우느냐 교회의 덕을 세우느냐


    자기의 덕과 교회의 덕
    오늘 목사님이 왜 갑자기 방언하는 부분에 말씀을 읽으셨는가? 우리도 방언을 해야 하는가 싶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말씀의 주제는 자기의 덕과 교회의 덕에 대해서 말씀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덕을 세우는 사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부분에 성경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주관한 청년집회
    어제 시청 홀에서 청년들이 주관한 청년집회를 하는 것을 보며 감사했고, 청년들이 직접 전도, 대관, 집회 준비를 다 하는 것을 보며 감사했고 많은 새로운 청년들이 와서 마인드 강연을 듣고 경청하는 것을 보며 또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부서가 복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감사하고 2015년 들어서 지구 상 전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길을 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주간 박목사님께서 아프리카의 스와질랜드, 레소토, 잠비아에 다녀오셨습니다. 월드캠프에 장관들이 오셔서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고 고국에 돌아가셨는데 이분들이 힘 있게 돕는 것을 봅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우리에게 땅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땅땅”거리며 산다고 하십니다. 아프리카 중에 복음의 진보가 더디었던 남쪽에 복음이 힘 있게 일어나는 것이 감사하고 남태평양에 복음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국 알래스카에서 칸타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꼬박 트레일러를 몰고 7박 8일의 일정으로 가야 합니다. 이제는 남극만 남았다고 할 정도로 우리 선교회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 선교회에서 제일 육신적으로 사는 청년들이 작년부터 직접 집회를 하면서 올해는 집회 물질이 남는다고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 나오미의 삶은 망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 풍성하게 부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동물과 식물을 창조할 때는 동시에 창조하였지만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따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를 창조하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셔서 그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마지막이 여자였습니다. 여자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창조의 끝은 교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를 헐 때 그 사람을 도우 실 수 없습니다.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룻1:6~7)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권고하셨다는 그 말은 베들레헴과 유다 땅에 있는 백성들을 권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나갈 때에 풍족하게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떠나가는 나오미를 보았고 모압으로 간 나오미가 잘 되었다면 누가 믿음으로 살며, 누가 교회를 따르겠습니까? 나오미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허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은 나오미를 복되게 할 수 없습니다. 반면,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하나님이 권고하고 복을 주어서 오히려 나오미가 그 베들레헴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만듭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 나오미의 삶이 다 망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면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고 도우시지만 이와 반대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저주를 내리시고 망하게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춰보면
    우리도 적당히 이렇게 살다가 나오미처럼 어려움이 오면 모압으로 가자, 만일 나오미가 잘 되었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오미의 길에 복을 줄 수 없고 막아야 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고, 나오미가 잘못해서 벌주는 단순한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나오미가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허는 일을 하기 때문에 나오미를 복되게 하지 않고 어렵고 가난한 자들이었던 베들레헴 사람들을 풍성케 하셔서 그들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쪽에서 보면 너무 명확하게 보입니다. 내가 가는 길, 내가 선택하는 길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하나님이 도우실지 않을지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한 이 귀한 구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복음, 이런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쉽게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교회의 덕보다 자기의 덕을 세워놓고 살아갑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의 덕
    사람마다 인품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덕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의 덕, 교회의 덕과 세상이 말하는 덕은 다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말하는 덕을 갖추지 못해서 공공장소에서 따지고 소리를 치는 사람을 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소리치고 따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뭔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억울해서 소리를 치겠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덕스럽게 보지 못합니다. 이를 떠나서 영적 세계 안에서는 도덕적인 기준이 아니라 자기의 덕이라는 것은 자기의 영적인 것, 신령한 것, 옳은 것을 추구하는 삶과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삶을 구분지어야 합니다. 내 인생의 길에 하나님이 마음껏 돕고 축복하시려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 편에 서면됩니다. 룻기에서 나오미는 교회의 덕을 허는 쪽으로 갔지만 룻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쪽으로 옵니다. 자기 고향, 자기 친척에게로 가지 아니하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룻의 삶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삶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룻의 삶에 마음껏 축복하셔야 했습니다. 이삭 주우러 갔다가 보아스를 만나서 보아스의 아내가 되는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내가 옳은 사람 되려고 교회가 허물어지든,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든 그 길에 서 있는 사람, 하나님이 그 길에 축복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스파이로 가는 후새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음을 당하고 멸시를 당할지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마음을 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내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그러나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왕의 부친의 종이었더니 내가 이제는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고하라 저희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저희와 함께 거기 있나니 무릇 너희 듣는 것을 저희 편으로 내게 기별할찌니라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삼하15:30~37)

     

    신앙은 다윗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난으로 인하여 쫓겨 도망 다니는 것을 보며 옷을 찢고 흙을 날리며 다윗과 함께 하려고 나왔습니다. 후새의 신앙은 잘 한 것입니다. 므비보셋과 같은 경우,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후새에게 네가 나와 함께 하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의 덕을 세우는 영역을 넘어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는 일보다 더 큰일, 아히도벨의 모략을 폐하는 일에 후새를 스파이로 보냅니다. 사람들이 후새를 보면서 다윗을 헌신짝으로 여기고 압살롬에게 가는 모습은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을 짓입니다. 그러나 후새는 자기의 덕이 아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로 나아갑니다. 손가락질 당하고 야비한 자가 될지라도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자기 덕 세우기에 충실했던 요압의 결국은 대적
    성경이 이야기하기를 어느 것이 더 신령한 것입니까? 후새의 삶은 자기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부분에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요압은 자기 덕 세우기에 충실한 사람이지 교회의 덕을 세우기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삶의 결과, 그는 교회를 허는 자가 되었고 교회를 대적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결국은 교회를 허는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압이 그 동생의 죽임으로 인하여서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투항해 오는 적의 장수 한 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보았을 때 사울에게 속해 있던 나라가 자기에게로 돌아올 때 아브넬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넬을 받음으로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복하고 그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요압의 옳음 하나로 인해 이스라엘에 많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옳은 편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편에 설 때 복을 주시고
    육이냐, 영이냐를 따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이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지,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덕 세우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제가 사역을 해 오면서 교회에 이런 저런 문제가 있을 때 옳음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에 복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주영씨의 고령교 사건, 나라의 다리 공사를 하면서 두 번의 홍수, 그로 인해 국가에서 준 돈을 다 쓰게 되었고 자기의 사비를 털어서 그 공사를 마쳤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보니까 집 식구들이 판자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국가에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급 공사를 많이 맡으면서 현대라는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내가 망했고 내가 손해 보았다면 하나님이 보상을 해 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옳다는 것을 가지고 내가 손해보지 않으려고 교회를 허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를 돕지 않습니다. 정주영씨처럼 나라가 맡긴 공사를 하기 위해 그 동안 쌓아 놓았던 기반을 다 허비했음에도 나라가 그 사람과 그 회사를 신뢰함으로 현대라는 회사가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
    기쁜소식인천교회는 그냥 교회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몸을 무시한다면 이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내가 쫄쫄 굶고 있고 헐벗고 있다면 이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몸을 섬기는 것이 사랑인 것처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나 하나 옳은 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결국 교회를 대적하는 자로 드러납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도 자기 옳음 하나 주장하는 사람은 결국 가보면 교회를 대적하게 됩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음 하나가 그를 대적하는 자로 드러냅니다. 자기의 덕을 세우는 사람은 교회의 일꾼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 세우고, 자기 옳은 것 밝히고, 그 사람의 마음에 기쁨, 소망, 감사도 없는 것을 봅니다. 교회의 덕 세우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 행동이, 내 삶이 교회에 덕이 되냐, 안되냐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길을 갈 때 하나님이 마음껏 축복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울 때 복을 받는 영적 법칙
    이 법칙은 정확하게 떨어집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교회의 덕을 세우느냐, 교회에 염려를 끼치고, 교회에 폐를 끼치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이 일이 잘될지, 못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 교회의 덕을 생각지 않고 내가 보기에 좋은 길을 택하여 갑니다. 그 길로 가면 잘될 줄 알지만 어리석은 것은 저 길로 가면 망하는데, 오히려 교회의 덕을 못 끼치는데, 하나님이 그 길을 잘되게 할 수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납니다. 세상에는 어떤 법칙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해서 그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어렵게 말을 만들어서 열역학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발열 내의, 단열성과 보온성이 뛰어 날 뿐이지 자체적으로 열을 낼 수 없습니다. 이는 법칙에 위배가 됩니다. 영적 법칙, 교회의 덕을 세우느냐, 자기 덕을 세우느냐, 아니면 육으로 행하고 세상으로 향하고 있느냐, 나오미가 가서 교회를 떠나 육으로 간 길이 아니더라도 요압처럼 교회와 함께 하고 있지만 자기의 덕을 세우고 사는 삶과 교회를 세우는 삶에도 하나님의 동일한 법칙이 적용이 됩니다. 별 문제가 되지 않고 잘못된 것이 없어 보여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측면에 가서 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영적으로 볼 만한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1~22)

     

    교회의 덕을 세우느냐, 아니냐는 영의 세계에 들어가야 보이고
    베드로가 지금 자기의 덕을 세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면서 베드로는 주를 위하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며 자기를 세우는 자가 되지만 이는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느냐, 아니냐를 무엇으로 볼 수 있냐면 이는 영의 세계에 가서 그 눈으로 보았을 때 보입니다.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영으로 볼 만한 눈이 있어서 영적인 세계에 가서 보아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팀웍을 이루어서 팀이 경기하는 것을 보면 선수 개개인의 기량과 역량이 있습니다. 축구 개개인의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필요로 하는 선수, 팀의 기여도가 얼마나 높으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박지성 선수 같은 경우, 골을 많이 넣지 않아도 팀의 기여도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공격과 수비 역할 속에서 팀 기여도가 굉장히 높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박지성보다도 유럽 사람들이 더 좋아 했습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신령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 부분에 평가를 해야 합니다. 개개인의 신앙보다 과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덕을 세우며 십자가의 도를 폐하는 베드로
    베드로가 자기 덕을 충분히 세우고 있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3)

     

    로마가 이스라엘을 정복하면서 땅은 점령했지만 마음이 굴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마음까지도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유대인의 선생 랍비를 잡아다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부정한 음식,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안 먹으면 그 자리에서 처형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 군병 중 하나가 유대인의 랍비를 존경해서 다른 사람들 몰래 돼지고기가 아니라 소고기를 가져다 놓고 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비록 소고기지만 지켜보고 있는 저 사람들은 돼지고기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양심이 아닌 저 사람들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않겠다 하고 처형을 당해 죽습니다. 교회 앞에서 나만 괜찮고 나만 옳으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내가 죄인이 되더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의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았던 베드로, 주님 앞에서 충성스럽고 복되게 보이지만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면 십자가의 도를 폐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주를 위하면서 실제 여러분의 삶이 교회를 헐고 마귀 짓 하며 살아갑니다.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다 하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돕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교회에 덕을 끼치는지를 보아야
    죽어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는 베드로, 주를 사랑하는 사람, 죽는데도, 감옥에도 함께 가겠다고 하는 베드로, 이는 예언의 말씀을 폐하여 보겠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주를 사랑하고 섬기며 살면 되는지 알지만 교회를 불편하게 하고 교회를 섬기지 않는 삶이 얼마나 악하고 하나님이 그 길을 권고하지 않으며 도우시지 않은 이유를 모르고 삽니다. 나 하나 괜찮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 하나 모임을 가고 안 가는 것이 어때?’ 성경은 교회의 덕을 끼치지 못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4)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6~18)

     

    내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을 간증하는 것,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일만 마디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보다 귀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하면서 그 부분에 평가를 해 보십시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인지, 교회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동그라미를 그려서 선을 그어 보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내가 선을 그어 놓고 나보다 신령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치고 박고 싸울 수 있어도 그 보다도 악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교회의 덕을 못 끼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고하심과 도움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의 끝, 교회입니다. 내 인생이 안 될까 싶어 잘되게 하려고 애를 쓰지 마십시오.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오미에게 계속해서 안 되게 합니다. 남편이 죽고, 말론과 기룐이  죽고, 반대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쪽에 갔을 때 하나님이 그 길을 인도하며 열어주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옳은 사람에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못되었어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편에 있으면 하나님이 마음껏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 이 부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분은 마지막 창조의 끝이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손가락질 당하는 위치에 들어가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복 주시고 나를 세우시는 것을 결국에는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간에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하나님이 마음껏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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