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 좋은아침 | 2013.02.17 23:38 | 조회 15898

    룻기 속에 담긴 신앙의 단계

    일자: 2013.1.20()

    본문: 룻기 3:1-13

     

    본성이 제거된 좋은 나무

     

    목수들은 좋은 나무들을 보면 탐을 낸다. 내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방송국 인테리어를 하기 위해 한 목수 형제님이 오셨다. 이분이 나무를 보고 그렇게 탐스러워 하셨다. 목수는 나무를 보면 이게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를 잘 아는가보다. 아프리카에는 좋은 목재들이 있는데 너무나도 값이 싸다. 우리는 이게 비싼 나무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데 그 목수는 잘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가느다란 각목이 더 비싸다. 톱이 몇 번 지나갔느냐로 값이 결정되기 때문에 가느다란 각목은 톱날이 더 많이 지나갔다고 해서 더 비싸다. 나무는 본래의 성질을 빼내야 목수가 원하는 가구를 만들 수가 있다. 그 성질을 빼기 위해 오래 그늘에 말리고 바다에 담그거나 스팀으로 찐다. 그래야 뒤틀림이 없다. 내가 잊지 못하는 집이 있다. 집 기둥과 석가래와 문틀이 다 틀어진 집이다. 경상북도 춘양이라고 하는 시골에 사는 분이 집을 졌다. 집을 짓는 것을 전문가에게 맡기면 비싸니까 이분이 인부를 데려다가 집을 짓게 했다. 원래 목수는 집을 지으려면 나무 진을 빼서 변형이 없는 것을 가지고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이분은 나무를 사서 진이 빠지지 않은 나무로 바로 집을 지으라고 목수에게 줘서 그런 현상이 일어 난 것이다. 주변에서 보는 나무 중에서 가장 좋은 나무는 피아노 건반과 그 해머다. 이것은 조금이라도 뒤틀리면 안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와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질이 있다. 범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하나님은 빼내는 일을 하신다. 우리 마음에는 잘 하려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 늘 수고를 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성질이 들어 있다. 우리 관념 속에는 늘 잘 해야 한다는 본성, 뭔가 일을 하려고 하는 본성이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빼내는 일을 하신다. 잘하려고 하는 것이 나를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일을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 된다.

     

    오히려 잘 살게 해주는 추위

     

    지난주에는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신앙의 단계에 대해서 배웠다. 1단계는 은혜를 입는 단계다. 은혜를 입으면 오히려 자기를 신뢰하게 만든다. 그것이 쌓이다보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다. 3단계에서 하나님은 그것을 비우는 일을 하신다. 문제는 우리는 나를 비우는 것을 참 싫어한다. 자기가 세워지고 인정받는 것은 좋지만 자기가 무너지고 무시를 당하고 짓밟히는 것은 싫어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를 살린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에는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그곳에는 더운 나라, 약간 쌀쌀한 나라, 추운 나라 그리고 눈이 오고 얼음이 어는 나라가 있다. 기온에 따라 그 나라가 잘살고 못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케냐 옆에 탄자니아가 있는데 덥기 때문에 두꺼운 옷과 담요가 필요가 없다. 이불을 안 덮고 자도 문제가 안된다. 반면에 케냐는 7,8월이 되면 굉장히 추워서 두꺼운 외투, 담요 그리고 메트리스가 있어야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추운 나라다. 눈도 오고 얼음이 언다. 탄자니아보다 케냐가 잘 살고 케냐보다 남아공화국이 훨씬 잘 산다. 추위가 있다는 것이 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더 잘 살게 만든다. 잘 사는 나라들은 대부분 위도상에 추위가 있는 나라들이다. 일본과 한국이 그렇고 유럽에서는 프랑스, 독일 등 겨울이 있는 라인에 있는 나라들이 잘 산다. 겨울이 생존을 위협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잘살게 만든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두꺼운 옷과 담요가 없어도 되지만 케냐 사람들은 7,8월이 되면 굉장히 춥기 때문에 두꺼운 옷과 담요를 준비해야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무너트리고 비우신다. 이것을 넘어 가느냐 못 넘어 가느냐가 신앙의 큰 관건이다. 성경에서는 신기하게도 이런 신앙의 법칙과 마음의 세계들이 똑 같이 적용되고 있다.

     

    은혜를 입은 것 때문에 자기를 신뢰한 나오미

     

    룻기 1장을 보면 나오미의 가족이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지방으로 갔다. 어떻게 떠났는지가 21절에 나온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날 때 풍족하게 나갔다. 풍족하게 나갔다는 것은 베들레헴에서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베들레헴은 교회를 나타낸다. 이것이 은혜를 입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은혜를 입으면 입을수록 자기를 신뢰한다. 베들레헴에서 은혜를 입은 것 때문에 그 은혜가 더욱더 자기를 신뢰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입지 못하는 은혜를 많이 입어 풍족하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은혜 입었다는 것이 자기를 더 신뢰하게 만든다는 것을 몰랐다. 룻기 11절에는 나오미가 모압지방에 가서 우거하려고 했다고 되어 있다. 우거한다는 것은 잠시 머문다는 뜻이다. 정착하지 않고 잠시 모압에 머물다 오려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를 믿는데서 나온 생각이다. 자기는 잠시 머물다가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누가 게임에 빠지고 마약에 빠지는가. 자기를 믿는 사람이다. 나는 언제든지 그런 것을 끊을 수 있다는 사람이다. 손을 댔다하면 그 곳에서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쉽게 중독이 되지 않는다. 나오미는 기근이 왔으니까 잠시 모압에 갔다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좀 쉬었다가 돌아오고 싶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다. 떠났다가 영영 못 돌아온다고 생각한다면 쉽게 쉬고 싶다고 할 수가 없다. 나오미는 자기를 믿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은혜를 입은 것이 자기를 신뢰하게 만든다는 것을 못 깨달았다. 은혜를 입은 것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베들레헴에 머물러야하는 이들이 베들레헴을 떠나고, 자기를 믿는 자가 되게 했다.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 때문에 망한다.

     

    자신이 비워진 후 베들레헴에 속한 나오미

     

    하나님은 나오미를 그냥 망하게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자기를 비우는 단계로 이끄신다. 사단이 나오미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게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바꿔서 자기를 비우는 과정으로 인도하신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서 가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룐과 기룐이 죽고 10년 정도 지났다. 룻기 14절처럼 자기를 비우는 단계로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이끄셨다. 신앙의 세 번째 단계는 자기를 비우는 단계이고 네 번째 단계는 속하는 단계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그곳에 속하게 된다. 베들레헴에서 은혜를 입고 풍족하게 된 1 단계에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속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베들레헴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은혜를 입고 좋지만 자기의 판단을 믿으면서 베들레헴을 떠났다. 그 단계에서는 자기가 베들레헴에 속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가 비워지고 다시 돌아 왔을 때 비로소 베들레헴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베들레헴에 속하면서 나오미와 룻의 모든 문제가 보아스의 문제가 되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 왔을 때 탕자의 모든 문제가 아버지의 문제가 된 것과 같다.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속하는 단계가 되니까 모든 문제가 아버지의 문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이제 보아스가 일하는 단계가 된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같이 비워본 적 없는 신앙인

     

    자기를 비우는 과정 없이 은혜만 입고 살아 온 사람들은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지난 날 들을 돌아 볼 때 나는 교회 안에서 늘 은혜만 입고 쓰임을 받았는데 그것이 대적이 되는 줄은 몰랐다. 그래서 직분을 얻고 충성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비우는 단계로 이끄실 때 내가 복음을 향해서 충성하려고 하는 마음, 내 젊음과 생애를 드려 복음을 섬겨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졌다. 하나님이 나를 비우는 단계로 인도하실 때 복음을 위한 마음, 순수한 마음이 다 깨트려졌다. 나를 비워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만 계산하고 안타까워했다. 복음을 위해서 살려고 했는데 그 마음이 다 깨트려지니까 그것이 싫었다. 판단이 되고 불신이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비우는 단계를 모르고 온실 속에서 화초처럼 살아 왔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올 겨울이 참 추웠다. 손발이 시린다. 우리는 손을 비비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손을 비비고, 불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추위를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국에 와서 이런 추위를 느끼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을 통증으로 느낀다. 우리는 손 시렵다고 고통하지는 않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왜 이런 고통이 오냐하고 어려워한다. 자신이 무너져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게 너무 힘이 든다. 온실 속의 화초는 진한 향기가 없다. 들국화는 온실의 국화보다 더 진한 향을 낸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를 향해서 달려온 삶은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비우려고 하시는 것이다.

     

    비우는 신앙의 참 맛을 느낀 나오미

     

    룻기 121절부터 보면 나오미가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라고 했다. 나오미는 희락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나오미의 마음이 베들레헴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밑바닥에 들어갔다. 가장 부끄러운 자, 가장 천한 자, 가장 아무것도 아닌 자의 위치로 내려갔다. 나오미가 은혜를 입고 풍족하게 되었을 때는 한번도 이런 마음의 위치에 들어가 본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비워지면서 베들레헴에 와서 전에 자기가 무시했던 사람들을 보니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다 자기들의 터전이 있는데 나보다 못난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데 왜 내가 잘났다고 생각을 했을까.’ 자기를 믿는 마음이 다 비워졌다. 위치뿐만 아니라 스스로 비울 수 없는 자기를 믿는 마음이 비워졌다. 이런 마음이 되면 처음 입었던 것보다 몇 갑절 큰 은혜를 입혀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믿는 마음이 비워졌느냐 아니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형제 자매들에게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을 무너트리는 일을 하신다. 나오미가 이 신앙의 맛을 터득한 것이다.

    룻이 은혜를 입는 신앙의 1 단계

     

    룻은 모압여자로서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은혜를 입는다. 룻기 22절 이후부터 보면 룻이 은혜 입는 삶을 산다. 보아스의 밭에서 그가 물을 마시게 해 주고, 줌에서 뽑아 줘서 많은 이삭을 줍게 하고, 많은 은혜를 입게 해 줬다. 룻기 217절에 보면 룻이 이삭을 한 에바쯤 주웠다고 되어 있다. 한 에바는 22리터 정도 된다. 한 말이 18리터이므로 한 말 이상을 주운 것이다. 룻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양을 주워 올 수 있었는가. 보아스의 소년들이 줌에서 뽑아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하고도 상종을 안 하는데 룻은 모압 여자다. 모압과 암몬은 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족속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는 족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보아스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이것이 신앙의 1 단계다.

     

    룻을 빈 마음으로 이끈 참된 인도자 나오미

     

    룻은 은혜를 입어서 얻은 것을 시어머니에게 드리고, 보아스가 베풀어주는 떡도 갖다 드렸다. 룻이 은혜를 입고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오미가 룻을 봤을 때 룻이 은혜를 입고 풍족하게 돌아 왔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렇게 은혜를 입은 뒤에 무엇이 찾아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은혜를 입은 것 때문에 자기를 신뢰하겠구나.’ 자기를 신뢰하면 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내야 했다. 그래서 룻이 돌아오면 나오미는 수고했다, 잘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보아스의 종들이 룻이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라고 말한 것처럼 수고해서 양식을 얻어 왔는데 룻기 219절 이후를 보면 나오미가 너 참 수고했다는 말을 안한다. 나오미는 실컷 수고하고 돌아온 룻에게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보아스를 축복했지 나를 돌아보는 너 때문에 산다고 하지 않았다. 나오미는 룻이 한 에바를 주워 왔을 때 이것은 룻의 실력이 아닌 것을 안다. 누군가 은혜를 베풀어 줬기 때문에 얻은 것이다. 그러나 룻의 마음은 나 아니면 우리 집에 어떻게 살겠어.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망한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을 비우는 길로 이끌었다. 나오미는 자기가 그 길을 가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은혜를 입고 그냥 살면 그것이 대적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교회와 하나님은 우리를 비우는 단계로 이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인도다. 나오미가 하나님의 참된 인도자다. 3단계 즉, 자기를 비우는 단계로 나오미가 룻을 이끌었다. 룻기 31절에는 (시어머니)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하지 않겠느냐고 했고 4절에는 외간남자의 눕는 것을 봤다가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가서 누우라고 했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갈수 없는 길을 가게 했다. 자기를 비우는 길이다. 그러나 룻이 어머니가 걸어온 길을 봤기 때문에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어머니의 하나님은 은혜를 입히고 풍족하게 하고 세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 비우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 이 룻기 안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 귀한 마음의 세계가 흐르고 있다. 이 룻기의 베들레헴 일어나는 사건처럼 이 신앙의 길이 우리 교회 안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수천 년 전에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가는 과정이 우리 교회 안에 똑같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자기가 비워지고 무너지는 신앙의 가치를 아는 교회, 이런 신앙의 길을 가치 있게 여길 줄 아는 교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신령한 교회다.

     

    룻기 25절을 보면 룻이 어머니의 말씀대로 다 행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룻이 음란한 여자로 오인되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특히 모압 여자들은 이스라엘을 음행에 빠트려서 망하게 한 적이 있다. 큰 재앙이 이스라엘에 임하게 한 전과가 많다. 모압 여자는 정욕적이고 음란한 여자로 일컬을 정도로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아니, 우리 모압 여자들은 이스라엘로 음행에 빠트려 망하게 한 적이 있어. 내가 저 발치 이불을 들고 들어가면 음란한 여자로 오인 받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잖아.’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룻이 그 길을 가는 것은 자기를 다 비웠기 때문이다. 보아스를 만났을 때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 온 것을 귀하게 여겼는데 한 순간에 그것도 다 무너졌다. 이제는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들어가서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해야 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자의 위치에 내려갔다. 만약 결혼한 부인에게 외간 남자의 발치 이불을 들고 들어가 누우라고 하면 미쳤나하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룻이 그 곳에 들어갔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들어 갈 수 없는 길로 나오미가 인도했다. 우리 교회 안의 직분자나 목사까지도 자기를 비우는 곳으로 인도해 주신다. 그래서 연수도 시키고 직장을 잡게도 한다. 이게 자기를 비우는 단계다.

     

    속한 자, 곧 참된 안식의 과정

     

    그럼 왜 이런 복잡한 단계를 거치도록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안식을 위해서다. 룻이 은혜를 입는 단계가 참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룻기 27절 말씀을 보면 룻이 베들레헴에서 돌아 왔는데 그는 잠시 쉰 후에 아침부터 계속 수고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안식은 없었다. 그래서 룻기 31절을 보면 나오미가 안식을 주고 싶었다. 룻이 이삭을 주워서 룻과 나오미가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것도 한 철이다. 추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 수 있는가. 그 다음 추수 때가 되려면 한 참을 기다려야 한다. 은혜 입은 이것으로 겨울을 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안식이 아니다. 참된 안식은 보아스에게 속했을 때, 참된 안식에 들어갔을 때다. 룻이 지금은 충만하고 감사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으로 겨울을 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4 단계, 보아스에게 속하는 단계가 있다. 보아스에게 속하면 모든 문제가 보아스의 문제가 된다. 보아스가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은혜를 입는 단계에서는 룻이 일을 했다. 아침부터 잠시 쉰 후에는 룻이 수고하는 삶 밖에 없었다. 그 삶과 보아스가 일을 하고 안식에 들어간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보아스에게 속한 후에는 진정한 안식에 들어갔다. 룻기 318절을 보면 룻의 시모 나오미가 룻에게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다. 룻이 일하는 단계는 끝내고 보아스가 일을 하는 단계가 온 것이다. 그가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다고 했다. 이게 진정한 안식이다.

    성경은 이러한 마음의 법칙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룻이 일을 하고 있으면 어리석고 미련한 길이다. 늘 일하는 자로 살아온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래서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도시에 와서 편안하게 계시라고하면 그것을 못하신다. 우리 마음은 내가 뭘 잘해야 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 되는 것이 없다면 쉬지를 못한다. 내가 일하고 내가 은혜를 입는 단계를 살아서 그렇다.

     

    룻은 쉬고 보아스가 일하는 단계

     

    안식에 들어가면 너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룻은 쉬고 보아스가 일한다. 이스라엘에는 기업 무르는 자가 있다. 그곳에서는 장자의 족보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나라는 장손의 아들이 없으면 대가 끊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동생이 장자의 대를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생이 없으면 사촌이나 가장 가까운 근족이 대를 이을 수 있다. 당시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다. 그 사람이 기업을 이어 주겠다고 하면 그 기업은 보아스의 차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기업 무를 자가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니까 보아스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네가 기업을 무르면 그 엘리멜렉의 밭을 다 사서 그 이름으로 올려 줘야 하고...” 안 되는 쪽으로 이끌어서 포기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룻이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단계에 오면 내가 뭘 했다하고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위했다고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은혜를 입은 간증도 있고 주를 섬기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도 있는데 왜 그것을 다 깨트리는가. 왜냐하면 신앙의 초보 단계에서는 언제든지 교회를 떠날 수 있고 언제든지 대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속한 자,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 내 모든 문제가 주님의 문제가 되고 나는 안식하는 삶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보아스가 일하는 곳에서 룻이 자기 마음을 높일 수 없는 것처럼 안식에 들어가서 그리스도가 일하는 것을 보면 자기를 세울 수가 없고 자기는 무익하고 주님만 남는다. 그래서 승리하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 하나님은 이런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기 원하신다.

     

    맺음말

     

    우리는 늘 은혜 입는 단계를 넘어서 자기를 비우는 단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봐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지금 무너져 있어도 하나님이 저 형제, 저 자매를 인도하시는 구나, 주님이 한 단계 한 단계 일을 하고 계시구나.’ 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 교회가 숫자적인 성장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을 해서 이런 신앙의 가치를 알아가야 한다. ‘믿음 있는 척 하더니만 별 볼일 없네하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이다. 자기를 비울 줄 모르는 사람, 한 번도 그 길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비워지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오미는 비워진 길로 가 보았기 때문에 룻을 그 길로 인도하고 보아스의 발치 이불로 이끌었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 신앙인가. 그냥 감사하다, 은혜를 입었다,는 것 말고 그 단계 다음에는 자기를 신뢰하고 결국은 주님을 떠나고 대적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전에 우리를 비우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 하나님의 손길에 사용되어진 주변 사람들을 탓하는 대신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나를 이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손길은 보지 못하고 사람만 탓하고 어리석게 살아 왔을지라도 이제는 하나님이 형제 자매들의 영혼을 위해서 계획을 가지고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기 바란다.

    수정 답변 삭제 목록
    212개(9/11페이지)
    경인지역 말씀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52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4/2/9) 이성옥 2014.02.09 14367
    51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4/2/2) 이성옥 2014.02.09 14661
    50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4/1/26) 이성옥 2014.01.27 14851
    49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4/1/19) 이성옥 2014.01.23 14486
    48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2014/1/12) 이성옥 2014.01.14 14942
    47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4/14) 좋은아침 2013.05.14 15732
    46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4/7) 좋은아침 2013.05.14 15715
    45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3/24) 좋은아침 2013.04.13 15616
    44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1/27) 좋은아침 2013.02.17 15902
    >>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1/20) 좋은아침 2013.02.17 15899
    42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1/13) 좋은아침 2013.02.17 16224
    41 [인천교회]김재홍 목사 주일말씀(1/6) 좋은아침 2013.02.17 16994
    40 [인천교회]김재홍목사 주일말씀(12/23) 이재필 2012.12.29 16357
    39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말씀(10/14) 나오미 2012.10.17 21421
    38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말씀(9/9) 나오미 2012.09.19 16293
    37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말씀(8/12) 나오미 2012.08.14 16156
    36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설교(7/8) 나오미 2012.07.11 19823
    35 [부천교회]임태산 목사 주일설교(6/10) 나오미 2012.06.11 15696
    34 [인천교회]오성균 목사 주일설교(4/29) 온정란 2012.04.29 15192
    33 [인천교회]오성균 목사 주일설교(4/22) 온정란 2012.04.22 14784
    이전다음 글쓰기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