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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옥 | 2018.05.13 09:54 | 조회 3551

    201856일 주일오전말씀

    말씀: 다니엘18~16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 안에서 고난을 즐기는 삶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쉽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이 어렵고 쉬운 이유,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신앙의 두 갈래 길, 행위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위의 길은 어려울 수밖에 없고, 믿음의 길은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말씀을 듣고 앉아 있는데 마음의 길이 행위 쪽으로 나 있기 때문에 말씀을 행위로 받고 행위의 길을 가게 됩니다. 지난 주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잠시 죄악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더 즐겼다는 말씀을 나누었는데 모세가 특별한 사람이었기에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한 줄 알았습니다. 모세의 길,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 참된 신앙의 길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도, 나도 모세처럼 저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에서 떠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야겠구나하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지만 결과는 불 보듯 뻔하며 잘 안됩니다. 결국 모세는 특별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세는 그렇게 살았지만 나는 육신적인 사람이기에 나는 그렇게 안 되고 못 살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주저앉아 버립니다.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기 때문에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육신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선교회에 많은 종들이 있는데 박 목사님이 끊임없이 믿음의 삶을 사시고 모세처럼 복음을 향하여 힘있게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박 목사님이 아니고 목사님은 특별한 하나님의 종이니까 우리는 그렇게 못살아하고 많은 사역자들이 믿음에서 주저앉아 있습니다. 모세가, 박 목사님이 믿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을 보며 우리도 되겠구나 하고 믿음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육신의 안일한 생각 속에 그냥 머물러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 이후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기 전에 모든 죄를 사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 메시야를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갔는데 우리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신 이후에 모든 죄가 다 사해졌다는 것을 믿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이 말씀과 비교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11:24~25)

     

    여러분과 모세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것을 더 좋아합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모세는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하고 여러분은 죄악의 낙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기에 모세처럼 되려고 합니다. 행위 가운데 들어가서 노력하는 것이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이 부분에도 주님이 다 이루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내가 모세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세처럼 주님이 다 이루어 놓았구나 이를 믿어야 합니다. 갈등.., 나도 모세처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할 나를 믿으려 해도 나는 죄악의 낙을 더 좋아합니다. 내 판단을 믿을 것이냐, 말씀을 믿을 것이냐, 말씀은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도록 다 이루어 놓았습니다. 말씀의 판단을 믿는 사람은 고난을 더 좋아하도록 되어 있고 자기 판단을 믿는 사람은 자기 판단대로 죄악의 낙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신앙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낙을 누리는 것을 더 좋아하기에 고난 받는 삶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신앙은 십자가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판단으로 신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다 실패하게 됩니다. 모든 신앙에 출발은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으면 이것도 다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도록 다 이루어 놓았고 믿어야 합니다. 나는 죄악의 낙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행위로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에서 구분이 안 되는 사람, 많은 종교인들이 절대로 따라올 수 없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을 더 좋아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려고 하지 이미 되었다고 믿음의 삶을 가르치지 못하고 배우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 참된 생명의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 이루어진 세계 안에 와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어떠하든지, 낙을 더 좋아한다고 느껴지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과 판단이지 말씀은 고난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내 안에서의 변화가 아닌 십자가에서의 변화, 어떤 잘못된 모양과 부족함이 있든지 간에 마음을 바꾸려고 하면 10, 20년 지나도 변하지 않는 여러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출발, 주님의 판단을 믿으면 나는 이미 고난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져 있고,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롭다 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더 좋아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를 믿고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말씀의 여행을 떠나 많은 여정을 거쳤습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가지 못하는 이유, 믿음의 길을 가려고 하면 사단은 우리에게 가지 못하도록 믿음으로 살면, 복음을 위해서 살면 어려움을 당할 거야, 문제를 만날 거야이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1:8)

     

    다니엘이 정한 뜻, 많은 산과 어려움을 넘어야 합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마음만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환관장이 이를 허락해야 합니다. 이들의 얼굴이 초췌해지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하기에 안 된다고 합니다. 환관장에게 구하고, 감독자에게 구하며 열흘 동안 채식을 함으로 시험을 하라 합니다. 반대를 하고 장벽에 부딪혀도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부딪혀 나아갑니다. 뜻이 정해져야 믿음으로 살지 믿음으로 살면 어려워지고 손해가 날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는 환관장의 음성 앞에 뒤로 물러 날 것입니다. 뜻이 정해지니까 반대에 부딪히고 불가능한 조건이 보여져도 헤쳐 나가고 부딪혀 나아갑니다. 믿음의 삶을 살려면 뜻이 정해져야 합니다. 이 역시도, 내가 뜻을 정하고 가는 것도 행위입니다. 주님 앞에 물질을 작정하고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할 때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 그래서 뜻이 잘 정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뜻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뜻을 정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모세가 어떻게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으며 다니엘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고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까? 의지와 각오로 뜻을 정하는 것은 금방 무너지게 됩니다.

     

    룻과 오르바의 차이, 둘 다 뜻을 정해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갑니다.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10~14)

     

    왜 오르바는 그 고향, 그 신에게로 돌아갔고 룻만 시어머니를 따라갔습니까? 오르바가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뜻을 정했지만 신앙은 각오와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들의 마음이 진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정해 졌는지, 아니면 인간의 각오와 결심으로 되어진 것인지, 몇 마디 말을 해 보니까 금방 드러납니다. 오르바가 뜻을 정한 것처럼 보여도 믿음이 아닌 각오와 결심이었기에 결국 그 고향으로, 그 신에게로 돌아갑니다.

     

    다니엘이 각오와 결심으로 뜻을 정했다면 환관장이 거절하고 안 된다고 할 때 주저앉고 뒤로 물러났을 것입니다. 안 된다고 하는데도 이를 넘어 열흘 동안 시험해 보라하며 거절을 넘을 수 있는 힘은 각오가 아닌 믿음으로 뜻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믿음의 단어 하나가 아니라 그 뒤에 뜻을 정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세계, 내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주님이 다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다만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이미 의롭게 해 놓았는데 깨닫지 못해서 죄인으로 사는 것처럼, 주님은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다니엘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끊고 채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 그 길을 간 것은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려고 합니다.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공백을 누가 메워 줍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실제 느끼기에 죄악의 낙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이 차이를 해소 시켜야 합니다. 그 차이를 없앨 수 있도록, 그 공백을 건너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마치 다리를 놓듯이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것까지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셨기에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구원 받고 그냥 대충 대충 살면 이런 참된 신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합니다. 그 사람에게 많은 손해가 있습니다. 신앙을 제대로 배우면 오히려 많은 축복이 주어집니다.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위치 가운데로, 믿음으로 가운데로 이끌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고민을 합니다. 아이가 밥을 골고루 안 먹고 편식을 하면 아이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걱정을 하고 어떻게 골고루 먹일까 고민을 합니다. 하나님도 고민을 하셔서 성경에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모세가 특별한 사람이라서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모세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면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더 좋아했지만 하나님이 모세에게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바꾸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 이미 바꾸어 놓으셨고, 그리고 모세의 생각과 그 삶이 바뀌도록 이끄셨습니다. 여러분이 거듭날 때 이미 여러분은 고난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는 일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을 바꾸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죄악의 낙을 누리는 새로운 피조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신도시에 가 보면 집집마다 주택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 집 들어올 때마다 도로를 잘라서 수도, 하수도를 연결하지 않습니다. 신도시는 이미 하수구 라인, 전기, 가스도 다 연결할 수 있도록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도로를 다시 깨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놓으실 때 이미 다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서 아직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내가 느끼기에 죄악의 낙을 더 좋아하니까 아직 나는 고난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안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할 때,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려고 할 때 항상 어려움과 문제가 닥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다가 육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이 1차적인 생각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하면 어려움이 닥칠거야, 그래서 주저앉고 뒤로 물러나 버립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생각 하나를 바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하면 어려움이 닥칩니다. 어려움이 닥치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할 위치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믿음으로 살면 어려움이 닥치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 하나님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니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11:6)

     

    이 말씀 이후로 성경은 믿음으로 노아의 삶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모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상, 보상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십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면, 복음을 위해서 살면 어려움이 닥치는데 어려움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그 찾는 자들에게 보상을 해 주십니다. 첫 번째 보상은 이 땅에서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보상은 하늘에서 보상이 주어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 천국에 가서 믿음의 상급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이 땅에서는 어렵다고 생각을 합니다. 천국에 가서 상 받는 것도 당연하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주는 보상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첫 번째 보상, 영적인 보상이며, 그리고 두 번째는 육적인 보상입니다. 믿음의 삶을 이 땅에서 살 때 영적인 보상과 육적인 보상이 주어집니다. 영적인 보상, 믿음으로 살면 핍박과 어려움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보상이 있어서 그 어려움을 다 견딜 수 있게 해 줍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위로라 합니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6)

     

    복음을 위해서 살고 믿음으로 살면 핍박이 닥치는데 그 어려움을 각오와 결심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로 견딥니다.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

     

    때로 상담을 받으러 오실 때 어려움을 가지고 오는데 어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에 다 견딜 수 있습니다. 마음에 어려움만 있어서 어려움만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자매님이 남편 때문에 어려움을 이야기 했습니다. “자매님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없던가요?” 성경은 분명히 고린도후서 1장에서 어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서 어려움을 다 견디게 한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위로를 주어서 고난을 다 견디게 합니다. 너무 어렵고 힘들고, 하나님의 위로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데 이 위로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 문제만 해결되기를 바라고 어려움이 없어지기만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위로를 해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뜻을 찾고 있어서 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위로를 주셨습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지 왜 어려움을 당하게 하고 위로를 주십니까? 그 곳에 하나님의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난을 견디는 이 위치에 스스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지난겨울 매우 추웠습니다. 매년 겨울이 오기에 겨울 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겨울을 넘기지만 처음 겨울을 맛보는 사람들은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특히 아프리카 사람들은 겨울을 나 본적이 없고 견뎌 본 적이 없습니다. 고난을 견디다 보면 모세처럼 고난을 더 좋아하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피조물로써의 완전한 형상으로써 이미 만들어진 하나님의 뜻과 그 생각이 일치가 될 것입니다. 처음 그 시작은 믿음 편에 두고 시작을 해야 합니다. 말씀은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고 고난을 더 좋아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일 육신적이고 고난 받는 것을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사람일찌라도 성경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써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신앙의 시작,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믿음의 발을 내딛고 신앙의 길을 가보면,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손해가 날 것처럼 보이지만 사고를 전환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어려움을 당할 것 같고 핍박을 당할 것 같아 뒤로 물러나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시는데 영육 간에 충분한 보상을 해 주십니다. 고난을 더 좋아해서 받는 보상을 통해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성공한 사람, 뛰어난 사람도 많지만 고난을 더 좋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상류층,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상류층의 사람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마음의 세계를 기준으로 삼아서 보면 고난 때문에 고통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봅니다. 형편에 좌우되고 이끌리면서 어려움으로 근심하고 고통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아가는 마음의 세계, 고난을 더 좋아하는 삶입니다. 어떤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도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하나님이 보상을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범사에 복을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라 칭한 것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소유가 풍부해 졌고 범사에 복을 받았습니다. 룻기에서도 룻이 믿음의 길을 가면서도 영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여주인이 되어서 육으로도 그 풍성함이 주어졌습니다. 영육 간에 하나님의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보상을 주십니다. 문제는 생각 하나를 바꾸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어려움을 당할거야, 1차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사고의 전환, 2차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룻이 뜻을 정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세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충분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믿음에 그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2:12)

     

    온전한 상, 영육 간에 주어지는 온전한 상을 룻에게 주셨습니다.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2:13)

     

    마음의 교류, 룻은 모압을 떠나오면서 하나님이 온전한 상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온전한 보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잘 될지 모르지만, 이 또한 불신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온전한 보상을 주시겠다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복을 주시며 이 땅에서 영으로도, 육으로도 보상을 해 주는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를 믿었습니다. 무엇하러 뜻을 정하여 어려움을 당합니까? 하나님이 영육 간에 보상을 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다니엘에게 주어진 시험, 왕 외에 다른 이에게 절을 하면 사자 굴에 넣겠다고 다니엘을 시기한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허물을 잡을 수 없기에 다니엘의 신앙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삶,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어 놓은 그 창을 닫게 하려 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창을 닫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을 해 줍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찾는 삶을 닫아 버리게 사단이 일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창을 닫을 수 있고, 열 수도 있습니다. 닫으면 우선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결국 하나님의 위로와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핍박이 두려워서, 사자 굴에 들어갈 것이 두려워서 그 창을 닫기를 사단이 원하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수 없이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닫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살고, 복음으로 살려고 할 때 사단은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 말하며 하나님을 찾을 위치 가운에서 빼어 육의 생각 속에 머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보상을 해 주시고 하늘의 보상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영육 간에 보상을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도, 룻도 범사에 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는데 이 보상을 다 잃어버리고 사시겠습니까? 1차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살 뿐만 아니라 사고의 전환을 통해 어려움 속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온전한 보상, 그 위치에 가야만 얻을 수 있는 보상입니다. 오르바가 자기 백성과 신에게 돌아갔을 때 그곳에서는 온전한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들레헴에 와야 그 하나님의 온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룻과 보아스, 보아스가 룻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룻을 그 아내로 삼습니다. 룻의 마음에도 믿음의 세계를 아는 보아스를 만나야 했기에 발치 이불을 들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믿음의 세계와 비밀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 교류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세계를 터득한 사람이 있고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복음을 위해 살다가 어려움을 당할 것 같으면 오르바와 같이 믿음의 길에서 물러나 버립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고통과 어려움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게 찾아오는 어려움과 문제, 고통, 그 때는 무엇으로 견디며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미 우리는 고난을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을 믿었기에 늘 고난과 부담을 피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 마음이 일치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다니엘이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믿음이 자라게 되고 무슨 일을 만나고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내가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됩니다. 믿음의 길을 가면서 세상이 누릴 수 없는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의 깊이와 분량에 우리는 한 없이 부족합니다. 계란은 완전식품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영양소가 들어 있지만 그것만을 먹고 살 수 없는 것은 영양소가 충분하게 들어있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 알지만 충분한 신앙의 깊이가 없습니다. 계란과 신앙의 연결, 들어서 아는 것처럼 보여도 여러분의 삶을 바꿀 만큼 믿음의 세계가 충분하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믿음의 길을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 삶을 바꿀 만큼의 분량이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의 삶을 충분히 바꿀 만큼 말씀의 판단에 있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다니엘의 세 친구가 굳이 어려움을 피할 수 있음에도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은 온전한 보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는 1차적인 생각에 머물지 말고 생각 하나를 바꾸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서 고난을 견디다 보면 어는 덧 고난을 즐기는 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할 조건에 들어가십시오.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열고 하나님을 찾으면 핍박과 부담을 넘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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